십자군 전쟁 당시 서방세계에서 지어낸 이 말은 이슬람은 ‘무력종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킨 대표적인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지어낸 서방세계의 사람들은 아마도 “종교에 강요가 없게 하라”는 코란(이슬람교 경전)의 구절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의 순수한 계시의 말씀이 수록된 코란을 성스럽게 취급해 신자들이 지참하고 다니지 않는다는 특성도 몰랐던 것 같다.
▼테러후 이슬람 왜곡 심해져▼
지난달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등에 대한 테러사태와 최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편견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이슬람이란 종교명은 하나님(알라)으로부터 왔고 평화와 복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슬람교가 현세에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온 누리에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하게 함으로써 인류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1976년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이슬람성원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중앙이슬람성원에는 테러사건 이후 경비가 부쩍 강화되기는 했지만 예배시간마다 각국의 많은 이슬람 신자가 모여든다. 금요일 예배에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이집트 모로코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근로자 등 600∼700명의 신자가 모여들어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다.
한국인 이슬람 신자도 3만4000여명이나 되며 필자처럼 예배를 집전하는 지도자인 ‘이맘’ 중 한국인도 4명이나 된다. 한반도와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3∼14세기 고려시대이다. 당시 중국 원나라 조정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중앙아시아계 사람들은 고려 조정에도 진출했다.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 위구르인인 이들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고유 의상과 언어, 문화를 유지했다.
조선시대 유교에 의해 이질문화가 배척되면서 자취를 감춘 이슬람이 다시 한반도에 전파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1920년대 구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을 피해 투르크계 이슬람 신자들이 한반도로 피란 와 잠시 머물렀다. 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군의 선교로 이슬람이 한국인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한국에 소개된 이슬람의 실체는 과격하고 호전적인 이미지의 종교로 잘못 인식됐다. 최근 일부 모슬렘(이슬람교 신도)들에 의해 야기된 테러사태로 말미암아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더욱 심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테러는 어떤 연유로 인해 그 누가 행하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물론 제3세력에 의해 약 2000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나라 없이 방황하는 그들의 아픔과 한(恨)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하나의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고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잉태하게 함으로써 결국 보복의 악순환이 거듭되지 않겠는가.
‘지하드(성전·聖戰)’란 무엇인가? 첫째, 절제와 자제를 위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요 둘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불신자의 공격에 대응하는 성전이며 셋째, 이슬람을 지키고 이슬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고 모든 사회악을 추방하며 하나님이 원하는 정의로운 사회와 평화가 충만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폭력의 원인부터 제거해야▼
흘러가는 역사 앞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보복이건 응징이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고귀한 생명의 희생을 가져오는 폭력의 고리를 누군가는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대로 폭력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러한 대업이 반드시 성취돼 테러 없는 세상, 평화가 공존하는 지구촌이 되고, 힘을 가진 미국이 악연의 고리를 단절하고 아량을 베풀기를 진심으로 애원하면서 이번 사태로 희생된 모든 분의 명복을 빈다.
이행래(한국이슬람교 중앙회 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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