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화제도서/파리에서]'프랑스어로 말하던 유럽'

  • 입력 2001년 10월 26일 18시 25분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말하던 유럽'/마크 퓌말로리 지음, 팔르와출판사

콜레쥬 드 프랑스 대학 교수이자 프랑스아카데미 회원인 마크 퓌말로리(Marc Fumalori)는 그의 최신작 < 프랑스어로 말하던 유럽(Quand l'Europe parlait fran ais) >에서 18 세기 유럽의 사상계, 정치계, 사교계에서 사용되던 문화 언어로서의 프랑스어를 소개하고 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이미 화두에 오른 바 있는 이 책의 주제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주제이다. 저자는 18 세기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서 왕래하던 서간, 수필 담론들을 모아, 명쾌한 해제와 상세한 주석을 곁들여, 당시 유럽 지성인 사회의 '프랑스식' 대화법을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18세기 유럽의 엘리트 지성인들은, 그들의 국적-러시아, 프러시아, 스페인, 영국-을 불문하고, 프랑스어로 철학과 사상을 토로하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유럽에 "국경 없는 프랑스어권 공동체"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18세기 유럽의 지성계를 이끌던 많은 인사들의 서간, 일기, 회고록 등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수필 담론들을 담고 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 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이탈리아의 갈리아니,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 유럽 각국의 왕가와 귀족들….

궁정과 살롱에서 통용되던 18세기 프랑스어 속에서, 저자는 현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의외로 생동감 넘치는 언어를 발견했음을 강조한다. 당시 유럽 지성인들은 프랑스어로 편지를 쓰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정열의 스페인 여인과 매혹적인 영국 신사가 서로 사랑을 속삭일 때, 그들은 스페인어나 영어가 아니라, 제 3의 언어, 연애 언어(?)인 프랑스어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당시 유럽 지성인들이 프랑스어를 즐겨 사용했지만, 프랑스어가 대중들의 의사소통 언어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8 세기 당시, 여행자들은 프랑스와 유럽의 여행지에서 여인숙 주인들과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고 푸념한다. 실상, 프랑스어는 파리와 주변 '일드프랑스' 지역,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조차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다.

당시 프랑스는 다양한 지역언어와 지방사투리들의 모자이크였기 때문이다(참고로, 바이욘에서는 바스크어, 마르세이유에서는 프로방스어로 대중들은 이야기하였다. 대혁명이후 나폴레옹의 언어통합 정책으로 오늘날의 프랑스어 모습을 갖추게 된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와 프랑스 밖에서 사용되는, 소수 엘리트들만의 '문화 언어'였던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어가 프랑스와 유럽 각국에서 보편성을 띤 유럽 문화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음을 일관되게 보여주고자 한 이 책에서, 흥미롭게도 저자는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어의 위기'라는 매우 시사적인 문제를 서문 후반부에서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누구나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선호하는 경향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가 세계를 주도하는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잃어버리면서, 프랑스어는 과거의 향수 속에서 근근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는 영어이지만, 오늘날 영어의 역할과 18 세기 프랑스어의 역할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한 저자의 지적은 날카롭다. 공항이나 호텔, 비즈니스 등 일상에서 통용되는 상업 언어와 문화를 생산, 전파하는 문화언어는 결코 경쟁관계가 될 수 없다. 더구나 18세기 프랑스 문화가 유럽에서 보편성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현대 사회에 팽배해 있는 자기 문화에 대한 자만심, 혹은 타문화에 대한 오만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와 이태리어로 글쓰기를 즐겨하는 볼테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몽테스키외, 러시아를 배운 번역가 디드로…. 프랑스어의 보편성은 리바롤이 말하듯 "타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적극적인 공감 속에서 만들어지는 코스모폴리터니즘에서 나온 것이"다.

과연 오늘날 지배언어가 돼가고 있는 영어가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21세기에 프랑스어가 문화언어의 지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런 야심이 부당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오늘날 지성 세계는 18세기 계몽시대의 지성 세계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성인들은 더 이상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재정?경제적, 기술적, 정치적 요인으로 정의된다. 마크 퓌말로리의 최신작이 소개하는 18 세기의 문화는 현대 사회를 주도하는 대중적 엘리트들이 원하는 모델이 아닐지도 모른다.

임준서(프랑스 LADL자연어처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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