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책]‘녹색평론’ 발간 김종철교수

  • 입력 2001년 11월 8일 18시 55분


【“오늘날 벌어지는 생태파괴 현상은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에서 비롯됐습니다. 구원의 길은 인간이 내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데서 찾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대다수가 보다 빠르고 보다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세상에 정반대로 ‘속도를 줄이고 가난해지자’고 주장하는 사람. 격월간지 ‘녹색평론’의 발행인 겸 편집인 김종철 영남대 교수(김종철·54)는 그런 사람이다. 파괴된 지구를 되살리고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현대 서구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삶의 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91년부터 만 10년간 ‘돈안되는’ 녹색평론을 60권째 발행해왔다. 10년전 내걸었던 발간 취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고 공생적 문화가 유지되는 사회의 재건에 이바지한다’는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실제 녹색평론은 한국 환경생태론의 산실역할을 하고 있다.】

# “세상이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

5일 대구시 수성구 범어4동의 허름한 상가건물 2층에 있는 녹색평론 사무실을 찾았다. 편집실과 책창고를 지나면 맨 구석이 책과 잡지가 빼곡하게 들어찬 김교수의 방. 점심 무렵 도착한 기자 일행에게 “시장할 텐데, 식사부터 하자”며 채식주의자인 그가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숯불갈비집’. 아니나 다를까, 돌솥비빔밥을 시킨 그는 조금 들어있는 고기를 옆사람 그릇에 옮겨준 뒤 식사를 했다.

그는 예상 밖으로 달변이었다. 인터뷰를 한 6시간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말했다. 오후 무렵 수성못가 카페에서 맥주가 두잔 정도 들어가자 말 봇물이 터졌다.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유교문화잔재와 미국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학계에 대한 비판에 그가 교유하고 있는 문인들의 근황에 이르기까지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종횡무진하는 얘기를 관통하는 중심 화두(話頭)는 “세상이 갈수록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개탄이었다. 이런 생각은 지난해 통권 50호(2000년 1∼2월)에 김교수가 책 머리에 쓴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인간보다도 기계와 기술이 갈수록 득세하고, 온 세상이 투기꾼들이 활개치는 난장판으로 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무리 순진하게 들릴지언정, 우리는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에 대해 되풀이하여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의 운명과 생명공동체 전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사회 및 문화체계가 과연 인간다운 삶에 적합하며, 또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지속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고자 한다.”

#“‘녹색평론’으로 큰 위로를 받는다”

통권 60호를 맞은 녹색평론은 참 재미없어 보이는 잡지다. 누런 재생지를 사용하고 표지코팅도 하지 않으며 상업광고를 안 싣는다. 사진도 아예 안 쓴다. 발행부수도 8000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5000여명의 정기독자들이 전국 11개 지역에서 모임을 만들어 생태운동을 펼친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 책을 다시 보게 된다.

녹색평론은 지난 10년간 고발과 반대 중심의 환경운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태문학 작품을 발굴하고 수돗물 불소화 반대운동, 지역통화운동, 대안학교, 유기농업, 대체의학 등 21세기의 대안적 삶을 제시해왔다. 또 이반 일리치, 프리츠 슈마허, 루돌프 바로, 루이스 멈포드 등 근본주의적 생태론자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렸다.

소재는 다양하지만 일관된 시각은 비주류 소수파의 목소리로 ‘창조적 불복종’과 ‘진리 앞의 단순함’을 조용히 주창하는 것. 91년 11월 창간호가 나왔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당신이 한다”며 소설가 박경리씨 등 문단 원로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박완서 신영복 권정생 김성동 송기원씨등 글을 기고하던 지식인들은 자칭 ‘녹색평론 전도사’들이다. 법정스님은 “만일 내가 잡지 하나만을 구독해야 한다면 단연 녹색평론을 보겠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김교수는 지식인층보다 “이 책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는다”는 평범한 독자들의 반응을 더욱 반긴다.

녹색평론이 이들의 손에 전달되기까지는 필자 섭외, 번역과 편집, 출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김 교수의 노력이 절대적이다. 국내 필진의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녹색평론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번역된 글. 그래서 김 교수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인터넷이나 각종 잡지를 뒤지는 데 할애한다.

출판사 경영에서도 그의 생태주의 노선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교수월급을 고스란히 쏟아붓던 출판사가 그럭저럭 손익이 엇비슷해진 데는 전적으로 96년 출간 뒤 6만부 이상 팔린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가 효자 노릇을 했다. ‘책값(5000원)이 너무 싸니 가격을 좀 올리지 그러냐’고 묻자 그는 “가격을 내리는 게 목표”라 말한다. “경영난에서 벗어나려면 책을 더 많이 팔거나 가격을 올려야겠지요. 하지만 책의 취지에는 어느 쪽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도 독자가 늘게 되면 가격을 낮출 참입니다.”

#‘문학평론가가 생태주의운동가가 된 까닭은….’

지금은 생태주의운동가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그는 70∼80년대에 대중문화비판과 제3세계 리얼리즘을 탐구하는 문학평론가로 필명을 날렸다. “창작과 평론만이 문학은 아니지요. 세상사는 도리를 모색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하는 녹색평론 발간작업도 큰 의미의 문학활동입니다.”

요즘들어 교수직까지 그만둘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그가 생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80년대 중반 미국 유학중 찾아왔다. “나이아가라 폭포가에서 동료들과 야유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파아란 물 보며 ‘정말 깨끗하다’고 하자 미국인 동료들이 ‘이 물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물’이래요. 그때 소개받은 책이 랄프 네이더가 쓴 ‘러브 카날’이었습니다. 강물에 화학공장에서 쓰레기를 퍼부어 오염됐다는 것을 한 기자가 오랜 추적 끝에 폭로한 내용이었죠.”

정신이 버쩍들었다. 미국에서 이 모양인데, 성장일변도로 전국을 들쑤셔온 한국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때부터 환경과 관련한 저널들을 닥치는대로 파고들었다. 90년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구독해온 환경잡지들의 내용이 혼자 보기에 아까워 벌인 일이 녹색평론 창간이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스승은 고 장일순(1928∼1994) 선생. “투쟁과 경쟁이 아니라 협동과 연대가 새로운 삶과 문화의 기본원칙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걸 몸으로 실천하며 사셨던 어른이지요.”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은 장일순 선생을 기리기 위해 몇 년에 걸쳐 자료들을 긁어모아 문집 ‘나락 한알속의 우주’를 펴내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 한쪽 벽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장선생의 글씨가 걸려 있다. “저거요, 세월 지나면 값이 오를 텐데, 일부러 파리도 똥누고 하라고 유리를 안끼웠습니다. 그게 장선생의 뜻과 맞는 것같아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 또한 그에게 마음의 등대 같은 존재. 결핵을 앓으며 토방에서 혼자 살아가는 권선생을 찾아가는 방문길을 그는 ‘성지순례’라 말한다. “그 양반 한달 생활비가 5만원이면 빠듯하고 10만원이면 풍족하다고 해요. 무욕을 몸으로 실천하는 어른이지요.” 권선생은 어쩌다 출판사에서 몇만원 원고료라도 받게 되면 “녹색평론 살림이 어렵지 않느냐”며 우편환으로 보내주곤 해 질겁을 하게 하다고 한다.

#“이 상태론 어른도 아이도 불행하다”

그는 자신을 “진보적이라기 보다 급진적”이라 말한다. 포식의 시대에 채식주의를 주창하고 ‘개발과 환경의 조화’ ‘녹색산업주의’ 등은 기만적인 수식어, 면죄부일 뿐이라 말하는 그의 ‘비타협성’은 근원적으로 주변과의 불화를 낳을 수 있다. 외롭지 않은가.

“전혀 외롭지 않아요. 8000명의 구독자가 있고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격려와 마음으로부터의 지원이 큽니다.” 농촌의 노인들로부터 “지금과 같은 방식의 농업으로는 땅과 사람이 다 죽는다”며 “녹색평론의 유기농업 논리와 환경보호 대안들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는 격려라도 받으면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사실 지난 500∼600년 동안 인류사를 지배해온 ‘약육강식’의 기본법칙을 배격하고 약자 중심의 사회를 만들자는 녹색평론의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일지 모르죠. 그런 ‘현실성 없는’ 메시지야말로 인간다운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의 궁극적인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견해에 동의해준 독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요즘 관심은 아이들을 어떻게 낳고 기를 것인가에 있다. 녹색평론 60호 특집도 그 내용을 담았다. “한국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불행합니다. 이렇게 쉴새없이 변하고 끝없이 욕망을 창출하기만 해서야….”

그는 종양으로 갑상선을 떼어버렸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건강이 너무 좋으면 엉뚱한 욕심을 낼 수 있는데, 요만큼만 하며 살라는 뜻 아니겠느냐”는 게 그의 얘기. 하지만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과연 ‘그만큼’만 하며 살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격정이 읽힌다. “솔직히 ‘비현실론’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쪽이 현실적인가를 따져보자고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가망없는 길로 치달아가는 게? 현실론의 대표주자인 경제학자들은 상상력이 결핍돼 있어요. 지금같은 ‘무한성장’을 전제로 한 터무니없는 논리가 세상을 지배해서야 지구에 미래가 있겠소?”

녹색평론은 9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올해의 교보환경문화상 대상을 받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시상을 거절했지만 주변의 권유로 생각을 바꿨다. 상금으로 수돗물 불소화 반대운동을 제대로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만난사람〓서영아기자>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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