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화제도서]'현대사상 임시 증간-이것은 전쟁인가'

  • 입력 2001년 12월 14일 18시 29분


◆도쿄에서

◇ 현대사상 임시증간-이것은 전쟁인가/데리다 외, 세도샤(靑土社)

지난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은 전 세계를 전율케 했다. 하이제크한 여객기를 고층 빌딩에 들이받는 것과 같은 식의 테러는, 지금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로 인한 무지막지한 피해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그 방법이 너무도 충격적이고 비극적이라는 데에서 우리는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일본의 대표적인 잡지인 '현대사상'이 테러 직후에 기획.편집한 임시 증간호다. '현대사상'의 이 번 호에는 데리다, 지제크(Slavoj i ek), 후쿠야마, 월러스타인, 촘스키, 삿센(Saskia Sassen)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거장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 글들이 씌여진 것은 미국이 확신을 갖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빈 라딘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빈 라딘을 숨겨 놓은 아프가니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해 보복전을 벌이려고 하던 바로 그 무렵이다.

입장은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보복 공격에 반대하고 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같은 친미 지식인조차도 군사 행동에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급진적이고 비판적 지식인인 촘스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여태까지 묵인해 온 미국에게 보복할 자격은 없다고까지 단언한다. 물론 테러에 찬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복 공격은 또 다시 대립의 불씨를 낳아, 비극적인 테러를 확대재생산하는 원인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정상적인 감각일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테러 직후의 충격의 와중에서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부분이 폭넓은 시야와 여러 상황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어, 설득력을 더해 주고 있다(그러나 '이 테러로 비로소 미국이 정치적 통일체가 되었다'고 하는 후쿠야마의 논조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정치학, 시스템론, 국제관계론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거나, 미국의 보복 공격에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같은 태도가 이 번 테러와 같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비참한 사건 앞에서는, 왠지 서먹서먹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직까지도 필자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데리다의 글 '한없는 슬픔을 느낍니다'와, 이란의 영화 감독 마흐말바프(Makhmalbaf)의 글이다.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석한 마흐말바프는, 한 한국 기자로부터 다음에 제작할 영화의 테마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프카니스탄'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한국 기자는 '아프카니스탄이 뭐냐'고 되물어 그를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의 나라에서까지 이렇게 무관심하니 세계가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대단히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바미양의 불상을 파괴했을 때 세계 각국은 신랄한 비난을 던졌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백만명이 넘는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이 주린 배를 움켜 쥐고 죽어 가고 있었는데, 왜 그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슬픔을 표명하지 않았는가?'라고. 이어서 그는 '지금 세상은 사람보다 불상이 더 중요한가?'라고 절규한다.

스스로 제기한 이 질문에 대하여, 마흐말바프는 고통과 슬픔에 가득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은 이 비극의 난폭함을 느껴 쓰러진 것이다. 빵을 필요로 하는 나라 앞에서 필요도 없이 거기에 있었던 부처님은 굴욕에 못 이겨 쓰러진 것이다'라고.

테러는 잔혹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아프카니스탄의 죄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 또한 잔혹한 것이다. 이 폭력 앞에서 우리들이 먼저 느끼는 감정은 '한없는 슬픔'임에 틀림없다. 어떤 입장이든지간에 오직 증오와 분노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거나, 합리적인 설명에만 열중한다면,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번 테러와 같은 종류의 폭력, 즉 인간의 '죽음'을 대상화해 수량화해 버리고 마는, 무시무시한 폭력에 가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을 전체화하는 것은 죽은 이에 대한 산 이의 거만함이다. 백 사람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의 백 배의 크기로 계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테러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죽음'에도, 기아와 미국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의 '죽음'에도, 그 한사람 한사람의 '죽음' 앞에서 똑같이 깊이깊이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다.

이연숙(히토쓰바시대 언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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