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올해의 녹색시민상 수상 오영숙 테레사수녀

  • 입력 2001년 12월 20일 18시 41분


마르고 까만 얼굴에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오영숙 데레사 수녀(吳永淑·50). 1년 간의 항암치료로 모두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채 새로 나기도 전에 그가 달려간 곳은 새만금 갯벌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마와 싸우는 동안 더 절실하게 ‘생명’의 소중함을 체험했다며 몸을 던지는 그에게 환경운동연합은 최근 ‘올해의 녹색시민상’을 수여했다. ‘암(癌)’을 안고 살면서도 펄펄 뛰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 ‘난 행복해’를 외친다는 그가 꿈꾸는 생명과 평화, 나눔의 삼위일체는….

#가난한 아이들의 공부방 ‘마가렛의 집’

부촌으로 알려진 성북동에도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달동네가 있다. 방과 후 학원에 갈 형편이 못되는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공부방, ‘마가렛의 집’(서울 성북구 성북2동 226-5)도 그런 곳에 있다. 18일 기자가 찾은 마가렛의 집은 아이들이 만드는 ‘성탄제’ 준비로 북적댔고 오 수녀는 학부모들과 전화를 주고 받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예, 21일요. 오뎅국 끓이고 떡볶이랑 귤 놓고 아이들에게 과자주머니를 나눠주려고요. 그 일 좀 도와주세요. 동네애들도 올 거니 한 80명분은 돼야 해요. 과자는 경동시장에 가면 도매로 팔아요.”

천주교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대표인 오 수녀는 김영애(金英愛·33) 수녀, 25명의 자원봉사 교사들과 함께 이곳을 꾸려가고 있다. 20평 공간을 세 개의 방과 거실로 쪼갠 이 집엔 날마다 오후 2시 쯤이면 40여명의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찾아든다. 워낙 좁아 개인 공간이란 없고, 밤 9시경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야 청소를 하고 마루에서 눈을 붙인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셈이죠. 다 오픈돼 있으니…. 하지만 그건 아무 문제 안돼요. 어쩌다 너무 힘들면 창고방에 들어가 짐 밀쳐놓고 한잠 자기도 하고 더 힘들면 다른 수녀원으로 ‘피난’도 가요.”

‘교육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온 나라에 가득한 세태에 4년 째 이 곳에서 달동네 아이들과 함께 지낸 오수녀는 어떤 교육관을 갖게 됐는지 궁금했다.

“아이들이란 공부하기 싫어하는 게 정상이죠. 전 교육이란 ‘싫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익히게 하는 거라고 봐요. 지식을 주입해주는 것보다 세상 살면서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하고 꾸준히 하다보면 지식도 늘어난다는 걸 배우게 하는 것이 교육 아닐까요.”

국어 수학 영어회화 피아노 등을 가르치는 이 곳은 형편이 되는 부모만 자발적으로 월 2만원씩 낸다. 오 수녀는 모자라는 운영비를 위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동원한다. 이날도 4시간여의 인터뷰시간 내내 젓갈을 주문하는 전화벨 소리가 꼬리를 이었다. 오징어젓 새우젓 등을 산지에서 사다가 파는 수익사업 때문이다. 일일이 주문받고 차로 배달하고 하는 일이 힘겨워 보였다.

“젓갈 한병 팔면 2000원 정도 남아요. 제가 아프다고 여러 분이 도와주셔서, 지난 겨울엔 200만원쯤 벌었다니까요…”라며 활짝 웃는 오수녀의 표정엔 몸성한 사람에게서도 느끼기 어려운 ‘삶의 활기’가 가득했다.

#암과의 싸움

오 수녀는 1999년 난소암 수술을 받은 후 1년 간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경기광주시 도척면의 한 수녀원을 찾아가 요양하며 견뎠다. 항암제 때문에 아무 냄새도 느낄 수 없고 책도 못보는 멀미 상태가 이어졌다. 이때 빠진 머리카락은 항암치료를 끝낸 8개월 뒤에야 온전한 모습을 찾았다.

“제가 항암치료를 못견디는 체질인가봐요. 밝고 감탄 잘하던 성격이 아예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리더군요. 지금 그걸 다시 반복하라면…. 그땐 정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는 1951년 생이다. 6·25전쟁통에 부모님이 평양을 떠나 부산에 정착하는 동안 오수녀는 모친의 뱃속에 있었다. 1978년 수도자의 길을 택했고 1987년 종신서원을 했다. 이런 그에게는 ‘왜 수도의 길로 들어섰는가’가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란다.

“어머니가 천주교신자였고 고등학교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곳을 다녔어요. 가톨릭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고…. 어느날부턴가 이 길로 부르신다면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게 된 거죠.”

병마가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몇차례 큰 수술을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1년이나 투병한 것은 처음이다. “창가에 서서 활기있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했어요. 그러니 요즘 일에 쫓겨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난 행복하다’고 느낄 밖에요.”

그는 투병을 통해 죽음이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곳일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참 교과서적 얘기죠? 저도 남들이 얘기할 땐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런데 그게 뼈저린 느낌이에요. 내면에 든든한 중심이 자리잡더군요.”

‘사는 게 기적이고 걸어다니는 것도 기적’이라 느껴지고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더라는 것이다. ‘조심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는 것도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몸을 사린들 재발할 병이 재발하지 않겠어요? 내게 이런 일이 떨어졌고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이라면 하는 거죠.”

그러다 어느날 ‘부름’을 받으면 그때 조용히 ‘아름다운’ 그 곳으로 가면 된다고 믿는다.

#‘새만금 수녀’

수녀회에서 그는 ‘새만금 수녀’라 불린다. 지난해 11월5일 새만금 갯벌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1년 간의 투병을 마치고 7월부터 일상에 복귀해 적응해가던 무렵이었다. 천주교 여자수녀회장상연합회 총회 프로그램에 참석했다가 새만금 갯벌을 난생 처음 찾은 그는 그간의 무지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갈 때는 많이 피곤한 상태였어요. 제가 부산 출신이니 바다가 그리웠어요. 바닷바람이나 쐬며 좀 쉬자는 사심을 품고 갔지요. 가서 문규현 신부와 신형록씨 등 갯벌지키기 운동 하시는 분들을 만나니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어요.”

이후 새만금에만 13번을 갔다. 기도회, 1인시위, 걷기대회, 단식, 철야농성, 거리서명운동 등 새만금과 관련한 일이라면 어디든 쫓아다녔고 주변 수도자들의 도움을 이끌어내려 했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새만금 갯벌을 살립시다’ 피켓을 들고 시위하던 수녀들도 모두 오 수녀의 ‘동지’들이다.

“수녀가 기도나 하지 웬 사회참여냐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신앙생활은 세상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겠어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게 우리 수도자들의 임무라고 생각해요.”

그는 새만금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커진다. 그리고 모든 얘기가 새만금으로 귀결된다.

“작고 꼬물꼬물하고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생명의 소중함, 그 섭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경외로운데, 그런 생명들을 다 죽인다니요…. 게다가 갯벌은 5000여년의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우리 생명을 받쳐주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오수녀는 작은 일에서 재미를 느끼고, 의미도 부여하고, 섭리를 찾으려는 습관을 가진 듯하다. 이런 식이다. “33이란 숫자가 중요해요. 제가 새만금을 가게 된 총회가 33차 총회였고 새만금 방조제 길이도 33km예요. 당시 조계사에서 새만금 살리자는 33일 철야농성이 진행 중이었는데 수녀들이 버스 대절해 격려방문을 했지요. 손발이 탁탁 맞아 일이 되는 걸 보며 하나님이 갯벌 살리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더군요.”

그는 새만금을 통해 댐문제 쓰레기문제 평화문제 등 다른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지난 가을의 화두는 ‘전쟁반대’였다. 미국의 아프간 보복공격에 반대해 800명의 수녀와 함께 명동성당에서 평화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의 수녀가 모두 8000여명이라니 전체 수녀의 10%에 이르는 규모다. “수녀회에서 수도자가 개인적으로 사회참여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수녀회에서도 이런 문제들을 깊이 이해하고 제가 활동하도록 배려해주시는 거죠.”

그는 이제 좀 쉴 생각이라고 했다. “갑상선도 재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고 해 1월에 한 20일 휴가를 쓸 생각입니다.” ‘수녀님들은 휴가 때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오수녀는 “‘친정’으로 가야죠. 언니가 살고있는 미국에 다녀올 생각이예요.”라며 또 활짝 웃었다.

#생명-평화-나눔의 삼위일체

마가렛의 집을 나와 오 수녀의 프라이드 승용차에 동승해 이날 5시로 예정된 환경운동연합 회의에 따라갔다. 그 곳 사람들에게 준다는 인절미도 한상자 들고…. 지각생들을 기다리는 막간을 이용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오 수녀에 대해 한마디씩 물었다.

“종교인이자 어른인데 소녀같아요. 갯벌에 나가면 펄쩍펄쩍 뛰어다니시고 여름밤 북악스카이웨이에서 서울 야경 바라보며 팥빙수 먹는 걸 좋아하시죠.”(장지영 환경운동연합 간사)

“자연친화적 수녀님이라고 할까, 삶과 자연이 존재하고 흘러가듯 자연스레 어우러져 티나지 않는 활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식입니다. 저런 분을 보면서 사회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나도 의미가 있고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이외수 민주노총 대외협력국장)

“조용하지만 무서운 분입니다. 조용히 말하는데 무게가 실려버리니.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서 더욱 기쁘고 편안하구요.”(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오 수녀는 생명과 평화, 나눔이 모두 한가지라고 생각한다. “설문조사를 보면 사람들이 교회나 절 성당에 나가는 이유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해요. 그만큼 평화라는 화두가 절박한 거죠. 그런데 평화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는 사람들이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려 한다고 잘 살아질 수 없으며 ‘모두가 잘 살아야 나도 잘 살게 된다’는 진리에 눈떴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특히 가진 사람일수록, 배운 사람일수록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특혜라는 걸 알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 혹 여성으로서 결혼해 아이낳고 사는 평범한 삶을 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지? 오수녀는 “제가 엄마가 됐다면 아이들이 고생했을 걸요”라며 큰 소리로 웃는다. 제대로 올곧게 살기를 요구했을 테니 얼마나 피곤했을 것이냐는 속뜻이 담긴 얘기였다.

<만난사람〓서영아기자>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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