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 만연한 불공정성이 궁극적으로 국론통합과 사회통합을 뒤흔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강원용(姜元龍) 대화문화아카데미 명예이사장과 권태준(權泰埈), 안경환(安京煥) 서울대 교수를 초청해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문화 풍토를 진단하고 그 치유책을 찾는 신년 좌담회를 마련했다.
▽안경환 교수〓새해 월드컵과 선거라는 두 가지 큰 행사가 있습니다. 대통령선거의 경우 선거를 치를 때마다 단순히 정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패러다임까지 바뀌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페어플레이가 뭔지, 이게 모든 나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가치인지, 특정 민족의 독특한 문화적 가치인지부터 얘기해 보았으면 합니다.
▽강원용 목사〓페어플레이는 당위 문제입니다. 전 세계 어디나 적용되는 가치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 때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 대선을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공정선거가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부터 관존민비의 전통이 뿌리깊은 데다 모두가 소수인 지배자 반열에 오르려니까 수단과 절차의 공정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뿌리깊은 가부장제 사회구조였습니다. 이 때문에 각종 차별이 생기고 여기에서 뿌리깊은 불공정성이 배태된 겁니다.
▽권태준 교수〓선거에 공정성이 없으면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불신당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절차와 과정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것은 지난 50년간 자본주의 시장(市場)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장과 정권이 유착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개입해 불공정한 경쟁을 조성하고 이 때문에 정치가 덕을 보는 그런 상황을 시장은 시장대로, 권력은 권력대로 공정하게 움직이는 상황으로 바꿔야 합니다.
▽안 교수〓많은 사람들은 한국이 최근 반세기에 이룬 발전이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말합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은 모든 지표가 밑바닥인 상태에서 출발, 최고 지표로 끌어올리고 20세기를 마감한 나라”라고 평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무리가 따랐을 것이고, 공정성의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물론 절차의 공정성이 중요하지만, 절차의 공정성을 통해 실질적인 공정성까지 보장돼야 한다고 봅니다.
▽권 교수〓절차의 공정성은 기회균등의 의미일 뿐 결과적 공정성까지 보장하는 장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에서는 절차의 공정성이 확보되면 결과도 같아질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실망과 좌절이 생깁니다.
▽강 목사〓남북의 분단이 공정한 게임을 깨는 원인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친북이다, 미국을 비판한다 하면 아예 발을 붙일 수 없는 상황에서 공정성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경제문제만 해도 우리 경제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군사혁명 이후 근대화가 시작됐기 때문에 산업자본 자체가 대부분 군사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본이 권력을 뒷받침하는,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불공정성이 60년대와 70년대를 횡행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성은 그 뿌리가 워낙 크고 깊습니다.
▽권 교수〓절차와 과정이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조성된 데는 사회지도층, 특히 공권력을 갖고 있는 계층의 특권의식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비판과 감시가 있어야 하는데, 최근 보면 감시기관인 법조계가 아주 실망스러운 상황입니다.
▽안 교수〓국민의 공복이어야 할 공무원이 과거의 관존민비 전통 때문에 오히려 국민 위에 서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9차례나 헌법을 ‘누더기 개정’했습니다. 황지우 시인은 심지어 우리 헌법을 두고 “변태성욕자에게 9번이나 유린당한 가련한 여인”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것인데, 특권계층이 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가정이나 학교에서 공정성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지 못한 것입니다.
▽강 목사〓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책에서 “한국인은 위대하지만, 궁중이라는 권력기관을 중심으로 온 나라가 소용돌이치는 것을 일반 국민과 연결하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 비극”이라고 썼습니다. 권력과 국민을 연결하는 매개집단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시민운동이 궤도에 올라서야 국민과 지도층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올해 선거의 페어플레이를 위해서도 많은 시민단체들이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안 교수〓3권분립 원칙을 밝힌 몽테스키외가 지금 다시 태어난다면 입법 사법 행정을 포괄하는 제도권력과 돈으로 대표되는 금력, 그리고 언론권력이라는 ‘신(新) 3권분립’을 얘기할 것입니다. 이들 세 권력이 견제와 균형을 잘 이뤄주면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지만 불공정하게 서로 유착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4의 권력’으로서의 비정부기구(NGO)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 교수〓시민단체의 사회적 가치는 그 객관성에 있습니다. 권력 금력의 유착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믿음이 있어 시민의 지지를 얻고 사회적 신뢰를 지니게 됩니다. 절차적 공정성을 습득하는 가장 일상적인 영역은 시장과 교육입니다. 시장의 불공평이 구조화돼 있는 현실은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의 공정성 교육이 중요합니다.
▽강 목사〓일본 어머니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 안 끼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들은 “어떻게 하든 이겨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이들에게 친구는 경쟁대상입니다. 올해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정치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역으로 나뉜 지금의 정당구조로는 공정선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또 ‘제왕적 총재’니, ‘제왕적 대통령’이니 하는 현상도 빨리 종식돼야 합니다. 이제는 왕개미를 따라 우르르 움직이는 ‘개미 군단’이 없어지고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미 대통령’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 구조로는 누가 대통령이 돼도 1, 2년 인기가 오르다 이내 무너지기 시작하게 돼 있습니다. 언론의 공정성도 문제입니다. 과거에 비해 상당히 공정해졌지만 언론은 선거 때마다 불편부당을 얘기하면서도 실제로 어디를 지지하는지 뻔히 나타납니다.
▽안 교수〓어떤 절차를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되느냐, 그리고 경선 결과를 수용하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요. 시민운동이 큰 붐을 일으키고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 요소를 걸러내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습니다.
▽권 교수〓공정성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많은 사람의 참여가 이뤄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민단체의 활발한 활동이 중요할 것입니다. 인터넷이 많은 이들의 참여를 위한 자극제가 되고 있습니다. 다만 네티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가벼워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오히려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안 교수〓지방선거 문제도 짚어볼 필요가 있을 텐데요.
▽강 목사〓지방자치가 되고 보니 지역이기주의에 따른 환경파괴 등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단체장들이 지역주민의 지지를 받는 데 급급하다 보니 환경을 보전할 길이 없습니다. 전체 민족공동체 안에서 지역문제를 봐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습니다.
▽권 교수〓단체장들이 연임을 하기 위해 눈에 띌 것만 자꾸 만드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지역 차원의 시민운동단체가 많이 생겨야 합니다.
▽안 교수〓올해는 월드컵대회도 있는데요.
▽권 교수〓관계기관의 태도는 이번 월드컵을 관광수입을 얻는 일대 기회로 삼자는 게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운동경기의 정신은 게임의 공정성인 만큼 세계적인 행사를 통해 공정한 경쟁으로 화합할 수 있다는 점을 어린 세대에게 강조했으면 합니다. 월드컵이 공정성의 상징으로 선전됐으면 좋겠습니다.
▽강 목사〓세계인들이 일본과 공동개최하는 월드컵을 통해 양쪽을 다 보게 될 텐데 조직과 운영에서 공정해야 합니다.
▽안 교수〓최근 시민단체의 소액주주운동을 통해 기업의 이사 개인에게도 잘못된 경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권 교수〓이 판결은 큰 파장을 일으킬 것입니다.
▽강 목사〓나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당선되면 경제구조의 불공정성을 바로잡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일부 개선되기는 했지만 기본틀은 그대로여서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솔직히 이번에 나오는 대선 후보들도 기본틀의 개혁과 실천에 별로 힘쓸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안 교수〓대학입시와 교육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큽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다시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입시난이도 문제 때문에 혼란을 겪었는데, 충분히 예고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바꾸는 것도 불공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권 교수〓우리나라에서 입학시험은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공정하게 이뤄져 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입학한 이후 어떤 교육을 받느냐 하는 더 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안 교수〓새해 아침인데 올해는 어떨지 전망해 주신다면….
▽강 목사〓착잡합니다. 최근의 국제정세는 한반도를 다급하게 만들 만한 위험한 요소가 많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민족 전체의 문제만큼은 여야와 지역 종교를 초월해 한데 힘을 모아줬으면 합니다.
▽권 교수〓지난 50년 간의 국가발전 과정을 바라보면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과 견주어 우수한 민족이고 해를 거듭할수록 나아지면 나아졌지 퇴보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나아지리라고 봅니다.
정리〓윤승모기자 ysmo@donga.com
이철희기자 klimt@donga.com
▼약력:강원용▼
△1917년생 △한신대 졸업 △캐나다 매니토바대 신학박사 △경동교회 당회장 △방송위원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 △통일고문회의 의장
▼약력:권태준▼
△1937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정치학박사 △서울대 환경대학원장 △경실련 공동대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약력:안경환▼
△1948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산타클라라대 법학박사 △미국에서 변호사 개업 △서울대 법학도서관장 기획실장 △현 한국헌법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