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게 듣는다]프랑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

  • 입력 2001년 12월 31일 16시 35분


【학문과 예술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을 으뜸으로 쳤던 중세 유럽 지식인의 전형으로 유럽인들이 꼽는 인물이 괴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우스트다. 오늘날 이 파우스트에 가장 근접해 있는 유럽 지식인을 꼽으라면 프랑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를 능가할 사람이 달리 있을까 싶다.

인문 사회 자연과학과 문학 음악 연극 영화 등 학문과 예술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수많은 저술과 작품을 남긴 아탈리는 ‘과연 한 인간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 파고드는 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더구나 지평선처럼 드넓은 지식과 혜안을 바탕으로 미래를 짚어내는 탁월한 통찰력은 새로운 책을 낼 때마다 화두(화두)를 만들어 내곤 한다.】

◇만난 사람=이건우 서울대교수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천재’라는 평을 듣는 아탈리를 안식년 휴가차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서울대 불문과 이건우(李建雨) 교수가 파리 교외 뇌이에 있는 아탈리의 자택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동아일보 신년 특집 대담을 위해 미국의 9·11 테러 이후 세계와 21세기 인류의 미래에서부터 인터넷과 신경제, 동북아와 한반도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얘기를 풀어나갔다.

▽이건우 교수〓당신이 쓴 두 편의 단편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복제인간의 사랑을 위하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주식시장 붕괴가 클라이맥스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당신은 비관론자인가.

‘복제인간의 사랑을 위하여’는 복제인간 여성을 사랑했던 한 남자가 최첨단 나노기술을 가진 집단의 도움을 받아 세계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다가 복제인간 여성이 떠나자 그 집단의 존재를 폭로해 2037년 세계 주식시장이 붕괴된다는 내용.

▼21세기는 디지털 유목민 시대▼

▽자크 아탈리〓낙관론이든 비관론이든 구경꾼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나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뛰는 사람에게 비관론이냐, 낙관론이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신이 말한 단편에서 주식시장 붕괴로 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하지만 인류는 최첨단의 나노기술을 나눠 가지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는 사회 변혁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피할 수도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당신은 97년 발간한 ‘21세기 사전’에서 21세기에는 인류가 1만여년의 정착생활을 청산하고 첨단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채 세계를 떠도는 새로운 유목민이 될 것이라고 전망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당신은 새로운 유목민을 정보를 창출하는 ‘하이퍼(Hyper) 유목민’, 정보를 향유하되 창출하지는 못하는 ‘버추얼(Virtual) 유목민’, 정보를 향유하지도 못하는 ‘인프라(Infra) 유목민’으로 구분했다. 소수의 하이퍼 유목민을 제외한 인류의 대부분인 버추얼 유목민과 인프라 유목민은 결국 구경꾼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탈리〓그렇다. 나도 그게 끔찍한 일이며 피해야 할 최악의 사태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유목사회의 도래를 경이로워 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구경꾼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미국에서 일어난 9·11테러가 그런 불안한 미래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당신은 9·11테러를 문명의 충돌로 보는가.

▽아탈리〓9·11테러는 가난한 자들의 절망적인 행위일 뿐이다. 전체 이슬람이 반기를 든 것도 아니다. 문제의 열쇠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공공의 영역에서 개인 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데 있다. 국가 전체가 종교화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기독교는 이미 18세기부터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아시아는 다신교의 오랜 전통으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여유를 갖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슬람교가 개인화되도록 돕는 것이다.

▽이〓하지만 테러 사태는 결국 중동 문제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중동 문제의 근원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해결을 위해 평소 생각한 방안이 있다면 얘기해 달라.

▽아탈리〓오사마 빈 라덴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전복이다. 그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려면 무엇보다 복수의 악순환이 중단돼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평화유지군을 배치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시장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서 승인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주변 아랍국에서 많이 흡수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에 민주국가가 성립될 때만 이스라엘은 평화 속에 살 수 있다.

▽이〓눈을 아시아로 돌려 보자. 당신은 아시아에도 유럽연합(EU) 같은 통합 기구가 탄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시아는 유럽과 다르다. 전통과 역사가 전혀 다른 국가들의 집합이다.

▽아탈리〓맞는 말이다. 하지만 유럽은 서로를 용서했기 때문에 통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이 겨우 용서를 비는 몸짓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하다.

▽이〓남북한 문제에 관한 의견도 듣고 싶다.

▽아탈리〓한반도 문제는 냉전이 남긴 마지막 상처다.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정부와는 지구촌의 누구도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조건 북한을 고립시켜서도 안 된다. 미국이 쿠바 봉쇄를 하지 않았다면 쿠바는 지금보다 더 많이 열렸을 것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체제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면 지금의 햇볕정책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북한 내의 변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미국과 유럽 어느 쪽도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이〓한국경제의 미래도 짚어 달라.

▽아탈리〓한국의 잠재적인 경제 능력은 대단하다. 특히 고도의 기술 인력과 미래과학의 발달은 한국경제의 앞날을 밝게 비추고 있다. 한국의 미래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이웃들과 얼마나 통합을 추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들 나라와 일종의 관세동맹 같은 것을 만들면 한국은 대단한 경제대국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장기적으로 러시아의 항구 역할과 중국의 상업적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한다.

▽이〓주제를 바꿔 보자. 당신이 ‘제7대륙의 발견’이라고 표현한 인터넷과 끝없이 성장할 것만 같았던 신경제가 오늘날 주춤하는 상황이다.

▼인터넷 최초의 거품 꺼진 상태▼

▽아탈리〓인터넷의 발견은 미국의 발견과도 같은 것이다. 황금을 찾으러 갔다가 실패해서 미국을 발견한 것처럼 인터넷에서도 누구나 실패를 경험한다. 인터넷으로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인터넷은 새로운 통신도구와 작업환경을 만들었다. 비로소 재택 근무도 가능하게 됐다. 휴대전화와 같은 통신기구의 기술과 시장도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지금 인터넷과 신경제는 최초의 거품이 꺼진 상태이며 두 번째 번영을 위한 휴지기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신경제는 나눠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재화를 세 가지로 나눠 보자. 첫 번째는 물질 재화다.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면 나는 갖지 못한다. 두 번째는 정보 재화다.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줘도 나 역시 가질 수 있다. 이를 신기술에 적용시키면 내가 정보를 CD에 복사해 남에게 나눠줘도 나에게 정보가 남아 있다. ‘무료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신경제는 전통적인 경제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의 종말까지 불러올 수 있는 매우 급진적인 얘기다. 세 번째는 시간 재화다. 시간은 물질과 정보와 달리 누구에게 줄 수도 없다. 미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재화다.

▽이〓지금도 돈을 주면 남의 시간을 살 수 있지 않은가.

▽아탈리〓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나의 시간을 판다 해도 그것이 곧 당신의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일의 진짜 싸움은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다. 프랑스나 한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려면 일정한 나이가 돼야 한다. 미래의 관건은 어떻게 수능을 볼 수 있는 나이를 줄이느냐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는 적어도 3000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시간이야말로 미래 인류의 최대 상품이 될 것이다.

▽이〓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 연장과 복제가 가능하다면 인류는 많은 시간을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기술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생명을 연장하고 자신의 시간을 축적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역시 가진 자만이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죽음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

▽아탈리〓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복제는 피할 수 없다. 나는 이미 20년 전에 인간복제를 예견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류발전의 동인(動因)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로, 어떤 사람은 오락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도피하려 하지만 미래에는 인간복제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복제인간에게 나의 의식까지 전이시킬 수 있다면 생명이 연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그렇다면 인간의 육체성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가.

▽아탈리〓내가 생각하는 지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끝으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말해 달라.

▽아탈리〓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지식인은 미래의 위험을 예측하고 인류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는 첨병 역할을 해야 한다. 지식인은 미래를 밝히는 등불을 들어야 한다.

진행·정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정치경제-토목-공학 섭렵…미테랑대통령 11년간 보좌▼

◆자크 아탈리 누구=43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자크 아탈리는 프랑스의 엘리트 코스는 다 밟았다. 한 곳만 졸업해도 수재 소리를 듣는 그랑제콜을 3곳이나 거치며 공학 토목학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프랑스 최고 지도자 양성소인 국립행정학교(ENA)까지 졸업한 뒤 파리 4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74년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당수의 경제고문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한 그는 미테랑 대통령 특별보좌관(81∼91년)으로 국가 경영을 기획했다. ‘미테랑의 휴대용 컴퓨터’란 별명으로 불린 것도 이때.

90∼93년에는 유럽부흥개발은행 초대 총재를 지냈다. 지금은 프랑스 정부 국정 자문역 및 컨설팅 회사인 ‘아탈리 아소시에(A&A)’ 대표, 빈민구제 국제기구 ‘플래닛 파이낸스’의 회장으로 있다. 30여권의 저서가 20여개 언어로 번역돼 300만부 이상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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