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76)〓“문학의 본질로 돌아가자.”
정초였지만 박씨 목소리는 그리 밝지 않았다. “늙음에 저항하는 중”이라고 희미하게 웃었다. 5개월전 넘어져 다친 뒤로는 몸이 영 불편하다고 했다. 머지않아 대하소설 ‘토지’가 3년만에 재출간되지만 마음도 편치 않은 듯 싶었다.
“문학이 자위를 위한 유희에 빠지고, 문인끼리 지엽적인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보고서 많이 절망했어요.”
그래도 박씨는 “달도 차면 기우는데…”라며 애써 희망을 찾았다. “자본과 권력이 이만큼 활개쳤으니 머지않아 문학이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문제로 돌아오지 않겠냐”고.
마음의 불편함을 달래고 싶었던지 지난해부터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 ‘토지’를 완간한 뒤 8년만에 펜을 다시 들기가 쉽지 않았을 터.
“원고지 50매도 안되는 작품인데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고, 지난 일년을 그랬어요.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데도 끝없이 욕심을 부리게 되네요.”
▽이청준(63)〓“글 감옥에서 풀려나고 싶다.”
이씨는 연초부터 글 감옥에 갇혀있다고 말했다. 원고지와 씨름하는 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올해의 소망은 단 하나, 그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순순히 문이 열리지 않으면 탈옥이라도 할 심산이다.
“올해는 기필코 초고라도 써두고 도망치고 싶네요. 몇 년 붙들고만 있으려니 이젠 무섭기까지 해요. 이제는 제발 날 좀 용서해주쇼, 글에다 빌고 싶을 정도니….”
그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제주도 등지의 무속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거짓말 같았던 옛이야기가 삶의 진실이었음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런데 글줄 나가는게 영 맘 같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 똑바로 바라보기가 이렇게 힘드네요”라며 허허 웃었다.
이씨는 지난해말 타계한 시인이자 한학자인 고(故) 김구용 선생 영정에서 ‘경전 같은 얼굴’을 보았다고 한다. 어떻게 나이를 먹어가야 하는가, 이 화두를 스스로를 가둔 감옥의 빗장 열쇠로 여긴다.
▽이문구(61)〓“우직하게 참고 견디자.”
이씨는 지난해 받은 암 수술로 한고비를 넘겼다. 10kg이나 빠졌던 몸무게가 치료 후에 절반이 회복됐다. 쉬엄쉬엄 운동하면서 기력을 회복하지만 아직 글을 쓰기에는 힘이 부친다.
올해 희망을 물었더니 “얼렁 힘내서 하반기부터는 새 작품을 써야 안되겠소”라고 대답했다. 손으로 쓸 것을 미리 머리에 그려놓은 듯 싶었다. 새 작품에 대해서는 “서점에서는 안팔리는 소설이라 불이익을 당할 만한 수수한 소설”이라 소개한다.
“방언을 써서 노인 이야기를 계속 써볼 생각이오. 쉬었다 쓰는 것이라 전과 달리 적어볼까도 했소만, 어디 인간이 그리 쉽게 변하겠소.”
그는 지난 몇 년동안 돈 되는 소설이 문학을 위축시켰다고 했다. 동구밖 장승마냥 떡하니 버텨서서 순수예술 지키는 이도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올해 덕담이 “꾹 참고 견디자!”라고.
▽이문열(54)〓“말이 폭력이 되지 않게.”
연초에 이씨는 생기에 가득차 있었다. 모처럼 찾아온 창작의 신열이 겨운 듯 싶었다. “지금의 희망이나 열정에 부응하는 작품이 나와줬으면”하는 소망 뿐이라고 했다.
다음달 중 장편소설 하나를 탈고하자니 마음이 부산하다. “비 정치적이고 비 사회적인 가벼운 소설”이 될 것이라 귀뜸했다. 산문집을 내기로 했던 계획은 괜한 입씨름에 오를까봐 후일로 미뤄뒀다. 대신 올해는 작심하고 연재소설을 시작해 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지난해 ‘곡학아세 논쟁’과 ‘책 장례식’ 같은 ‘화(禍)’가 창작 의욕을 자극한 ‘복(福)’이 된 셈. “문학 외적인 것에 대해서는 당분간 일체 입을 열지 않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대신 뼈 있는 덕담 한마디를 건냈다.
“올해에는 말이 폭력으로 쓰이는 부정(否定)의 사회가 아니라, 말이 올바르게 쓰이는 긍정(肯定)의 사회가 되기를.”
▽윤대녕(40)〓“디지털을 향한 조용한 변신.”
몇 달전 지하 골방에서 지상으로 작업실을 옮긴 윤씨. 그는 올해가 중요한 전기가 되리라, 아니 되어야하리라고 직감했다. 지난해 ‘사슴벌레 여자’에서 호평받았던 ‘디지털 상상력’을 발판삼아 ‘조용히’ 변신을 도모하려 한다.
“디지털 사이보그 인공지능 등 첨단의 문제와 권력의 문제를 연관시킨 긴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하지만 “아직 문단이나 독자들이 (변신을) 낯설어하는 것 같다”며 고민의 일단을 드러냈다. 그래서 “속을 단단하게 만들어야겠다”는 말이 건강만을 뜻하지는 않는 듯 싶었다.
그는 올해는 일단 2년 가까이 쉬었던 중단편 소설 창작에 힘쓰겠다고 했다. 겨울 초입쯤에는 창작집으로 묶어서 ‘은어낚시통신’ 이후 작업에 한 매듭을 지을 요량이다.
▽신경숙(39)〓“삭막한 시절 푸근한 이야기.”
신씨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으면 대답이 한결같다. “좋은 소설 쓰는 것.”
신년 희망 역시 다르지 않다.
“올해는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장편소설을 꼭 쓰고 싶어요. 다른 것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이것만으로 벅찬걸요.”
미뤄둔 숙제 같은 소설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현대사회의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찾는 소설이거나, 혹은 점점 눈이 멀어지는 주인공을 통해 본다는 의미를 탐구한 이야기거나.
‘바이올렛’ 같은 이전 작품과는 달라질 것 같냐고 슬쩍 물었다. “내 안에서 나오는대로 쓸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소박한 희망이 있다면 한가지. “그저 세월이 가만가만 평화롭게 흘러갔으면…, 문단이 더 이상 삭막해지지 않고 좋은 소리만 오갔으면…”. 그리고 덧붙여, “월드컵 때에도 독자들이 책을 많이 사 봤으면…”
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