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플이 있다. 가령 사회변혁에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운동권의 열혈 여전사와 정치에 대하여 냉소적일뿐더러 플레이보이 기질이 다분한 소설가 지망생. 더 나아가 여자는 가난한 고학생인데다가 외모마저 보잘 것 없는 반면 남자는 부르조아 계급 출신의 화려한 꽃미남이라면 사태는 절망적이다. 시드니 폴락의 ‘추억(The Way We Were, 1973)은 이 양극단의 캐릭터가 오랜 세월을 두고 변주하는 사랑을 품위있게 그려낸 영화다.
케이티(바브라 스트라이잰드)와 허벨(로버트 레드포드)이 함께 보낸 첫날밤은 인상적이다. 대학 졸업 이후 술집에서 우연히 재회한 그들은 전쟁의 광기를 핑계삼아 침대로 직행한다. 학창시절부터 먼 발치에서 짝사랑해온 남자를 품에 안은 케이티에게는 황홀했지만 정작 술에 취한 허벨은 정사 도중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곯아떨어진다. 짝사랑의 비참함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이다. 이튿날 아침, 자신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는 케이티를 보고 간밤의 사태를 깨달은 허벨의 표정은 또 얼마나 황망했던지.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뒤늦게나마 케이티의 진가를 발견한 허벨의 열렬한 구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천만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결혼 이후 그들이 펼쳐보이는 애증의 전면전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서로 사랑하면 삶의 태도나 성격적 차이 혹은 정치적 이견 따위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식의 장밋빛 프로파간다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케이티와 허벨은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 함께 잘 사는 것은 별개다. 그들은 서로에게 쓰라린 결별을 고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추억 속에서만 아름답다. 함께 있을 때면 불꽃 튀듯 격돌하며 서로의 가슴에 손톱자욱을 내다가 뒤돌아서서 추억에 잠길 때면 그리움의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게 그들의 사랑이다.
사회변혁운동이 시대정신처럼 받아들여지던 1980년대 한국에서 청춘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케이티라는 캐릭터가 낯설지 않다. 당시 우리는 모두 케이티였고 우리의 애인들 역시 케이티였다.
심산·시나리오작가 besmart@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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