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대학]“개혁않는 상아탑은 무너진다”

  • 입력 2002년 1월 28일 19시 06분


동아일보 교육팀은 ‘위기의 한국대학’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대학 총장과 교수, 대학정책 담당자 등을 초청해 대학의 문제와 대안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대학 현안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대학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학도 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데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냈다.

▽사회〓서울대 최고자문위원단의 보고서를 계기로 국내 대학의 경쟁력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대학의 경쟁력이 어느 정도입니까.

▽허남진 교수〓서울대는 학부와 대학원을 나눠서 봐야 합니다. 졸업생들이 외국의 유명 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잘하는 것을 보면 학부는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러나 대학원은 붕괴 직전입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봐야 교수 임용 등 취업에서 대접을 못받습니다. 2류 대학이라도 ‘외국 박사’을 더 쳐주니까 유학가는 것 아닙니까. 한국의 대학원생은장학금 지원이 적어서 도저히 생활이 안 됩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국내 대학원을 기피하기 때문에 교수의 연구 실적도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미국 교수들은 한국 대만 등 우수한 외국인 유학생을 연구에 활용해 좋은 성과를 냅니다. 최근 서울대 인문대 교수회의에서 ‘인문대 대학원 정원을 25% 줄이자’는 충격적인 제안까지 나올 정도로 대학원 위기가 심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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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수 국장〓세계적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좌절할 정도의 격차는 아닙니다. 그러나 국내 대학원들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외국에서 수입해 소개하는 수준입니다. 대학원에서 얼마나 질 높은 지식을 많이 창출하느냐에 따라 국운이 갈릴 것입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두뇌한국(BK) 21 사업’은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김영철 위원〓서울대가 경쟁력이 없다면 한국 대학의 교육도 경쟁력이 없다고 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을 대학에서 가르치지 못합니다. 몸집 늘리기에만 급급했지 경쟁력 있는 분야를 특성화하는 노력을 안했습니다. 대학 구조조정과 대학간 통폐합 논의도 눈에 띄는 변화는 없습니다. 국립대와 사립대, 수도권대와 지방대의 역할 분담과 통폐합 논의도 필요합니다.

▽윤덕홍 총장〓서울대부터 지방대까지 똑같은 교육과정을 ‘백화점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도 문제지요. 유사한 학과에서 비슷한 내용을 배운 졸업생들이 대거 배출되지만 질적인 수준은 낮습니다. 외국에서 우수한 교수를 모셔와도 국내 연구환경이 나빠 다시 돌아갑니다. 교수 연구인력을 양성하는 연구중심 대학과 직업교육중심 대학 등으로 특성화해 집중 지원해야 합니다.

▽서 국장〓구조조정이 활발하지 못한 것은 신분의 불안을 우려해 현상 유지를 바라는 교수들의 저항 때문입니다. 대학이 변신하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데 직선제로 선출된 총장은 교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대학들이 학과별로 신입생을 뽑는 ‘학과주의’에 집착해 학부제 도입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윤 총장〓총장이 개혁을 추진하려다 교수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대학도 1, 2학년 때 다양한 과목을 듣고 고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 방식의 학부제를 도입하려다 교수들의 반발에 부딪혀 보류한 적이 있습니다.

▽허 교수〓수십년된 학과주의를 하루 아침에 학부제로 바꾸려다 보니 과거 계열별 모집 같은 어중간한 형태가 됐어요. 일본 도쿄(東京)대는 학부제 도입에 10년이 걸렸습니다. 학부제를 하려면 기숙사 생활이 전제돼야 합니다. 미국 영국의 대학들이 소속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저학년 때 기숙사 생활을 의무화하고 여기서 클럽활동 등을 유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김 위원〓학부제가 학과주의를 허무는데는 기여했지만 본래 취지를 살리지는 못했어요.대학 실정에 맞게 실시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강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취업에 유리한 학과만 선호하는 바람에 인문학 등 기초학문 분야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고 아우성치는 것 아닙니까.

▽서 국장〓학부제가 제대로 정착되면 오히려 기초학문이 융성해질 것입니다. 기초학문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응용학문을 공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외국 대학에는 물리학과 철학 교수가 500여명이나 되는 대학도 많습니다.

▽허 교수〓그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미국 유명대의 학부과정에 법대 의대 경영대가 없어요. 대신 대학원 진학 때 로스쿨은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한 학생에게, 의과대학원은 물리학 생물학을 공부한 학생에게, 경영대학원은 경제학을 공부한 학생에게 가산점을 줍니다. 우리처럼 학부에 법학 의예 경영학과를 두는 한 이들 학과에만 우수학생들이 몰리는 건 당연합니다.

▽사회〓올해부터 시행된 교수 계약제에 대한 교수들의 불안감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수노조 결성도 이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이는데요.

▽허 교수〓교수노조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이해해줄 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국내 교수시장은 유연성이 없습니다. 미국은 한 대학에서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른 대학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서울대에서 재계약이 되지 않아 대구대에 지원한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윤 총장〓안받지요.(웃음) 재임용에 탈락한 교수는 혹시 인간관계 등에 하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계약제나 연봉제가 아니더라도 교수들을 공부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교육, 연구, 봉사활동 등의 배점을 다양하게 해 교수들이 선택하도록 하면 됩니다. 직급별로 기본급을 정하고 업적을 초과 달성했을 때에는 성과급을 주는 형식도 괜찮지 않을까요.

▽허 교수〓계약제에 수반되는 교수평가도 어렵습니다. 교수평가는 같은 학과의 동료 교수들이 주로 합니다. 평가위원으로 위촉된 외부 대학의 교수도 바닥이 좁아 서로 알고 학연 등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언젠가 동료 교수가 자신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냉정한 평가가 쉽지 않을 겁니다.

▽서 국장〓교수 계약제는 대학의 인사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국립대는 한번 전임교수가 되면 웬만해선 탈락하지 않을 정도로 정체가 심하고 사립대는 불분명한 계약조건을 내세워 악용하기도 합니다. 계약제를 통해 계약 조건을 명확히 하면 이런 폐단은 줄어들 것입니다. 앞으로는 우수한 교수를 좋은 조건으로 유치하고 실력이 없는 교수를 탈락시킬 수 있어야 대학이 발전합니다.

▽김 위원〓우리나라와 서양의 사회적 배경이 달라 계약제 도입에 신중해야 합니다. 계약연봉제가 악용되지 않으려면 임용권자를 견제할 수 있는 교수노조를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윤 총장〓형편없는 연봉으로 교수들을 계약제로 채용한 뒤 2∼3년 활용하고 내보내는 대학이 실제로 있어요. 재정수지를 맞추기 위해서 계약제를 악용할 수도 있습니다. 박사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교수의 근로조건이 악화될 수도 있어요. 문제 있는 재단이 있는 한 교수노조의 당위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서 국장〓그러나 사회 지도층인 교수들이 법을 어기고 노조를 만든 것은 잘못입니다.지금도 교수계약에 관한 보호장치는 있어요. 계약제는 신규 교수에게만 적용되는데 정년이 보장된 교수들이 노조를 만든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고도의 전문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교수 직종에서 노조의 단체교섭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현실적으로 교수노조를 허용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합니다.

▽김 위원〓임용권자에게 잘못 보여 파면되는 교수도 있고 연봉이 1200만원도 안 되는 교수도 있습니다. 한국적 상황에서 교수노조가 어울리지 않지만 노조가 근무조건과 처우를 개선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교육부가 분규 대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도 교수들의 동요를 부추겼다고 봅니다.

▽사회자〓지방대 문제가 심각한 위기 상황인 것 같습니다. 지방대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요.

▽윤 총장〓우리 대학은 학생 정원이 2만500명이지만 재학생은 1만8000여명입니다. 대부분의 지방대가 학생 부족과 취업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방대 출신은 실력을 검증받기도 전에 서류전형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서울로 몰리는 겁니다. 지방대 육성 특별법을 만들어 국가시험에서 지방대 출신을 일정 비율 합격시키고 국가 세출의 일부를 지방대 육성기금으로 확보해야 합니다. 5∼10년 정도 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그때 보완하면 됩니다.

▽김 위원〓지방대 문제는 교육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토의 균형발전 측면에서 지역발전과 연계해 해결해야 합니다. 수요보다 대학 수가 너무 많아요. 경쟁력이 없는 대학은 과감하게 통폐합해야 합니다. 모든 대학을 살리려다 지방대 전체가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허 교수〓70년대만 해도 몇몇 지방대학은 사회적 평판이 높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위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부의 수도권 편중 정책이 지방대 위기를 심화한 측면이 있어요. 학벌주의를 타파하지 않고는 지방대 문제와 대학 경쟁력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서 국장〓대학은 지역사회의 지적 자산과 사회문화적 기능이 집중된 곳입니다. 지방대를 살리지 않고는 지역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살리고 보자는 식은 곤란하고 대학별로 선별해 육성할 계획입니다. 실력보다 대학 간판을 우선시하는 학벌주의가 사라질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돼야 합니다.

▽사회〓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정리〓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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