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전통의 계승과 단절

  • 입력 2002년 1월 29일 13시 08분


선수의 유니폼에 등번호가 처음 붙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뉴욕 양키스에 의해서부터였다. 그 후 1930년대에 이르러 등번호는 모든 팀에 퍼지게 되고 선수에게는 그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물로 자리를 잡는다. 특정번호의 사용을 '영원히' 하지 않기로 하는 영구결번이란 '주로 프로야구에서 구단에 크게 기여한 선수 또는 감독을 기리기 위해 각 구단이 자체적으로 정하는 것'으로 당사자에게는 최고의 영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영구결번은 뉴욕 양키스의 '철마' 루 게릭이 사용했던 4번. 루게릭은 베이브 루스 등과 함께 살인타선(murderers' row)을 형성했던 강타자이자 작년 말 은퇴한 칼립켄 주니어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2,130경기 연속출장 신기록을 가지고 있던 전설적인 선수. 양키스는 1939년 게릭이 근육무기력증(루게릭病)으로 은퇴하자 이후 팀 내 어떤 선수에게도 등번호 4번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를 기렸다. 이후 현재까지 모두 138개의 등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 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중 특히 의미 있는 것은 ML 최초의 공식적인 흑인 선수로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활약한 재키 로빈슨의 42번으로, 다저스는 물론 메이저리그 전체에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어느 누구도 이 번호를 달 수 없다.

일본의 경우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왕정치(1) 나가시마(3) 사와무라(14) 가네다(34)를 영구결번 시켜 기념하고 있다.

20년 역사의 한국 프로야구에서 영구결번은 딱 세 개뿐이다. OB 김영신의 54번과 LG 김용수의 41번 그리고 해태 선동열의 18번이 그것.

김영신은 1군 경기에 22게임 밖에 출전하지 못한 무명의 선수였지만 그의 등번호가 영구결번까지 된 것은 좀 사연이 있다. 상문고-동국대를 거치며 대학시절 국가대표 주전포수자리를 놓치지 않았을 만큼 유망주였던 김영신은 프로 입단 후 좌절의 나날을 보냈다. 김경문, 조범현 이라는 뛰어난 선배들에 가려 좀처럼 출장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 무렵 김영신은 한강에서 의문의 실족사를 당하고... 사고사냐 자살이냐 의견이 분분했지만 자살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팀에서는 그의 영혼에 속죄하는 뜻에서 김영신의 등번호 54번을 프로야구사상 첫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반면, 김용수와 선동열은 뛰어난 실력과 함께 오래 동안 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필자가 이 글을 준비하던 도중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아 타이거즈의 신인투수 김진우에게 선동열의 영구결번 18번을 물려주기로 했다가 없던 일로 한 것이 그것이다. 비록 구단이 바뀌었고 당사자에게 양해를 구했다고는 하지만 한번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신인선수에게 주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기아구단은 무리하게 선동열의 18번을 김진우에게 넘겨주려 했을까? 신생팀은 그 속성상 전신과의 차별성을 두려고 노력하게 되어있다. 90년 MBC청룡을 인수해 프로야구에 뛰어든 LG가 즉시 추진한 일은 이광은, 김재박등 청룡의 간판스타들을 은퇴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김재박은 현역은퇴에 반발, 트레이드를 자청해 태평양으로 간다) LG에겐 '청룡이미지 지우기'가 급선무였던 것이다. LG는 90년 창단 하자마자 MBC시절에 한 차례도 해내지 못했던 우승을 차지해 신흥 명문구단으로 자리를 잡게되었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명문구단으로 태어난 성공사례라고 하겠다.

전통적으로 약체 팀의 이미지가 남아있던 인천구단의 전통을 불식시키며 강팀으로 거듭 태어난 현대 또한 과거단절 성공사례로 꼽아야 함은 물론이다. 쌍방울이라는 돈 없는 꼴찌팀 이미지가 자신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마음 편하게 과거와의 완전 단절을 시도할 수 있는 SK또한 나아갈 길이 명쾌하다고 하겠다.

새로 팀을 창단한 기아에게도 위의 사항은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지만 전신이 다름 아닌 해태 타이거즈라면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프로야구단의 운영주체가 바뀌면서 팀의 별명이 바뀌지 않은 경우는 이번 기아 타이거즈가 처음이다. 이는 좋건 싫건 기아가 다른 신생팀들과는 달리 과거와의 일방적인 단절을 선언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번 선동열 영구결번을 둘러싼 해프닝도 과거단절을 위한 시도가 벽에 부딪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영구결번 문제로 돌아가서 뒤늦게나마 기아가 선동열의 영구결번을 지켜주기로 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본다. 비록 이것이 기아가 원하는 '해태 이미지 지우기'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선동열로 대표되는 전성기 해태시절의 역사를 고스란히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오는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박철순의 21번, 이만수의 22번 등 더 많은 영구결번이 생겨나 역사로 또 전통으로 프로야구를 풍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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