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시생의 바이블로 통하는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론’ ‘채권각론’ 등 민법강의 시리즈의 저자다. 현재 법조계 최고 지위에 있는 대법관이나 검사장으로부터 말단 법률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책을 보지 않고 법을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 그는 77세의 고령에도 자신의 민법강의 시리즈 수정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한국에서 민법이 제정된 것은 58년. 지금까지 7차례의 개정이 있었지만 친족 상속법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사실상 올해 처음으로 물권 채권법 등과 관련한 개정이 이뤄진다. 당연히 그의 책에도 고쳐야 할 대목이 많아졌다.
부지런함은 그의 천성인가 보다. 그의 민법강의 시리즈는 늘 남들보다 한발 앞서 최근의 법령과 판례의 변화를 반영해왔다. 서울대 법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지만 ‘한국 민법 최고의 교과서’를 업데이트하는 일로 요즘도 오전 2시 이전에 잠을 청하는 날이 드물다.
그가 서울대 법대에 전임강사로 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민법이 제정되던 해였다. 첫 제자들은 이시윤 전 감사원장, 가수 최희준씨 등 법대 12회 졸업생. 61년부터 민법을 강의했고 63∼71년 8년에 걸쳐 민법강의 시리즈를 완간했으므로 60년대 학번부터의 서울대 법대생은 거의 모두 그의 강의를 듣거나 그의 책을 보고 민법을 공부했다. 민법이 모든 법의 근본임을 감안하면 그는 해방 이후의 서울대 법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교수시절 ‘곽 교수에게서 A를 받는 것이 사시 민법시험에서 과락을 면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학생들에게 학점을 박하게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는 늘 대형강의실에서 진행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법원행정처 송무국장인 박병대 판사(76학번)는 “당시 법대 민법강의는 3개 반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교수가 담당했지만 곽 교수 반이 아닌 학생들도 그의 강의를 들으러 수업에 들어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며 “선생님의 강의는 칠판에 쓰는 분필이 뚝뚝 끊어질 정도로 힘차고 자신감에 차 있었고 ‘했단말…’로 끝나는 특이한 어투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우방 법무법인 파트너인 이숭희 변호사(83학번)는 “국내 다른 민법학자의 견해를 거의 무시하는 곽교수가 그래도 인정해 주는 학자가 선배인 김증한 교수였지만 김 교수조차도 이론적으로는 그에게 압도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의 위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였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 비친 서울대 법대생들은 어떠했을까.
곽 교수는 “늘 한 해의 3분의 1은 굿(good)이었고 3분의 1은 배드(bad)였다”고 평가했다. 그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들의 정원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지만 정원과는 상관없이 3분의 1은 늘 함량미달이었고 3분의 1은 뭘 해도 잘 할 것 같은 학생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로 접어든 지금 법관의 자질 저하에 대해 깊이 우려하면서 “엉터리 의사가 많아지면 의료사고가 빈발하듯이 앞으로 엉터리 법률가가 많아져서 소송사고가 빈발하고 억울한 의뢰인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법률가가 돼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능력이 있다는 것과 법률사무에 맞는다는 것은 다르다. 법률가는 조금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노력하면 될 수 있다. 다만 법률가의 수를 채우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자격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현재와 같은 사법시험 방식으로는 자격있는 사람을 제대로 가려낼 수 없다. 사시 2차 시험에서 민법은 주관식으로 두 문제가 출제된다. 두 문제만으로는 운이 좋아 시험을 잘 본 건지 실력이 있어 시험을 잘 본 건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최근 들어 5000쪽에 달하는 그의 민법강의 시리즈보다 1500쪽 안팎의 고시용 책들이 널리 읽히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곽 교수는 미국 로스쿨의 시험에 대해 언급했다. 거기서 치르는 민법 시험은 시험지 두께만 손가락 한마디 굵기에 해당할 정도로 문제수가 많다. 학생들은 그걸 3시간만에 풀어야 한다. 당연히 제대로 공부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간의 실력차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사시 합격자가 늘어나면서 대다수 서울대 법대생들이 사시로 몰리는 현상에 대해서 곽교수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본다. 과거에는 사시 합격자 정원이 서울대 법대의 정원보다도 훨씬 적어 졸업생들이 법조계 외에 다른 분야로도 많이 진출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시 합격자 정원이 서울대 법대의 정원을 훨씬 초과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법대에 들어온 이상 법률가의 자격을 얻고나서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는 것이 그 분야를 위해서도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방직후부터 51년에 이르는 어수선한 시기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졸업했다. “당시 좌익들은 나를 극단적인 리버럴리스트라고 몰아붙였지만 그냥 어학공부나 하고 지냈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이때 배운 독일어 실력이 일본책을 통하지 않고도 민법을 연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당시 읽은 책 중에는 헤르만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등이 들어있다.
그는 경성제대가 아니라 서울대를 나온 최초의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 그가 ‘민법강의시리즈’를 쓸 무렵 기존의 교과서는 국내에서 실무가 돌아가는 것에는 캄캄한 사람들이 일본 교과서를 베끼다시피해 펴낸 일본 판결 일색이었다. 국내 판결을 찾아내 가능한 한 일본 판결 대신 국내 판결을 인용해 설명한 그의 책은 한국 사람이 한국인의 시각으로 쓴 최초의 민법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곽 교수는 정년 퇴임하는 날까지 학장자리 한번 맡지 않고 강의와 연구에 전념한 보기 드문 교수였다. 공부 이외의 일에는 신경쓰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한번 일에 몰두하면 무서운 집중력으로 일을 했고 점심 식사마저 귀찮아서 거르는 일도 예사였다. 취미도 바둑 두고 가끔 골프를 치는 것이 전부다. 3급 실력인 바둑도 골몰해서 둔다면 휴식이나 오락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굉장한 속기로 둔다.
95년 고희(古稀)기념논문이 출간돼 후학들이 열어준 행사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애써서 만들어줘 고맙다”고 한마디 한 뒤 “이런 자리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허식의 자리가 돼서는 안된다”며 예고없이 ‘상속법, 재산법인가 가족법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해 후학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런 성격을 반영해서인지 그의 호가 지어진 이유도 지극히 단순하다. 그저 후암동에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후암이다. 서재의 책을 옮기는 번다함이 싫어 65년부터 37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아침이면 집 근처 남산에 올라 산책하고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만한 알래스카 허스키종 개 3마리와 잠시 놀고 나면 서재에 들어와 또 책을 펼쳐드는 것이 요즘도 그의 일상이다.
법률가들의 책상에는 어디나 그의 민법강의 시리즈가 꽂혀 있다. 대법관을 지낸 이용훈 변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대법관 시절에도 무엇이 옳은 판결인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는 후암선생의 책을 펼쳐들고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해봤다고 한다. 그는 “후암선생이야말로 평생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학문의 외길을 걸어온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퇴임한 후에는 후배 교수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학교 근처에는 얼씬하지도 않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사표(師表)였다”고 말했다.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