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이야기라는 것이 정보 습득과 처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 인간의 인지 메카니즘이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 이야기의 인지적 역할과 기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한참 더 기다려야 할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다소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두뇌과학 쪽이 설정하고 있는 가설의 상당 부분은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가설이기보다는 경험적 데이터이다. 문학에서 본 인간은 무엇보다도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과 인간의,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파악한다. 아니, 이야기는 그의 ‘세계’이다.
그는 이야기의 우주 속에 태어나고 이야기로 성장하고 이야기 속에 살다가 이야기를 남기고 죽는다. 죽어서도 그는 이야기 속에 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우리 속담은 말한다. ‘이름’은 어떤 문장 속에 들어가 주어 노릇을 할 때에만 제대로 이름이 된다. 그 문장이 ‘이야기’다. 이야기를 빼면 인간은 그냥 원숭이다.
말을 알아듣는 순간부터 아이들이 이야기에 대한 폭발적 욕구를 발동한다는 것은 이미 수천 년의 관찰이 확립해놓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유아는 ‘말을 알아듣기 전’부터 그의 주변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이 이해방식은 기억에 의한 ‘연결’과 ‘연상’에 의존한다. 지각 대상들을 이리저리 연결하고 관계를 세우는 두뇌의 전 언어적 작동은 이미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야기에 대한 욕구 폭발은 연결과 연상에 의해 이해를 넓히려는 ‘이야기하는 동물’의 종적 특성 때문이다.
다시 문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 종적 특성을 규정하는 것은 만사를 연결하고 이어 붙이는 은유의 기능이다. 은유야말로 인간의 특징적 인지모형일 것이다.
이 인지적 특성을 최대한 자극하고 계발하고 세련화하는 것도 이야기다. 외톨이로 자라는 아이들도 제 혼자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부모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책 읽어주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이들의 성장에 극히 중요하다. 괴테를 키운 것은 매일 밤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야기꾼 어머니’이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통해 ‘위대함의 감각’을 키운다고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위대성, 정의감, 윤리의식 등 우리가 ‘인성’이라 부르는 것은 도덕 교과서로는 얻어지지 않는다고 이 철학자는 말한다. 그런 교과서보다는 신화, 영웅담, 모험 이야기, 성장소설 같은 이야기를 읽게 하라고 그는 충고한다.
우리에게도 풍성한 이야기 전통이 있다. 문제는 아이들 앞에서 직접 이야기를 들려줄 화자(話者)로서의 부모, 교사, 이야기꾼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 그리고 이야기의 교육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꾼 할머니’의 존재가 지금처럼 그리울 때가 없다.
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