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대사에서 1945년의 ‘패전’은 역사의 크나큰 단절이라고 믿어져 왔다. 즉, ‘전전(戰前)’은 군국주의 파시즘이 사회 전체를 억압했지만, ‘패전’을 계기로 ‘전후(戰後)’ 일본은 민주주의 사회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전전과 전후를 ‘단절’로 보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른바 ‘총력전 체제론(總力戰體制論)’이 등장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전전’의 어둠에 ‘전후’의 밝음을 대비시키는 사고방식이, ‘전후 일본’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본다.
‘총력전 체제론’의 골자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선진국에 공통된 사회변용(社會變容)이 일어나 국가 체제의 통합력이 시민을 ‘동원’하는 형식으로 강화되어 갔는데, 그러한 틀 자체가 ‘전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저자인 나카노에 따르면, 이는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파시즘 국가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기본적으로는 똑같다고 한다. 파시즘과 민주주의라는 깃발의 빛깔은 달랐지만, 시민의 결합력을 국가에 흡입시켜 모든 사회 자원을 국가 체제에 ‘동원’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나카노 도시오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다. 오쓰카 히사오(1907∼1996)는 근대 유럽 경제사의 대가로, 막스 베버와 마르크스에 바탕을 둔 그의 독특한 학풍은 ‘오쓰카 사학’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는 일본 정치사상사의 거장으로, 적어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시대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활발한 발언을 했던 카리스마적 지식인이었다. 두 사람은 전후의 일본 사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떳떳한 민주주의 사회로 키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저자 나카노는 ‘시민’을 향한 이들의 호소가 결코 전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쓰카와 마루야마의 글이 처음 발표된 전전의 지면들을 꼼꼼히 살핀 결과, 이들은 군국주의적인 방법은 아니었을지언정, 시민을 사회로 ‘동원’하기 위한 방법을 계속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로서의 일본’을 자명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오쓰카도 마루야마도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겠지만, 이들 두 사람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한 인식밖에 갖고 있지 못했었다. 이들이 식민지 지배를 긍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지배가 근대 일본의 발걸음 중에 가장 큰 이탈이었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저자 나카노는 식민지 지배는 근대 일본의 이탈이기는커녕, 근대 일본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나카노의 자료 분석 중에는 부자연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문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의 ‘근대’에 대한 성찰은 이제 막이 열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연숙(히토츠바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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