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로레알 코리아 아르젤사장의 '알찬 주말'

  • 입력 2002년 2월 7일 15시 53분


황규태씨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황규태씨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프랑스 화장품회사인 로레알코리아 피에르 이브 아르젤 사장(44)은 주한 외국인 사이에 ‘휴일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통한다. 1936년 세계 최초로 유급휴가를 시행한 프랑스 출신인데다가 레저 문화가 발달한 독일, 핀란드 등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고, 만능 스포츠맨이기까지….

그가 한국에 부임한 지 2년5개월. 하지만 그를 잘 아는 한국인들이 오히려 그에게 주말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어볼 정도다.

●주말은 가족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

‘가족중심주의’의 유럽인이라 당연히 아르젤 사장의 주말 보내기는 가족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내와 여기저기 가고, 가족과 이런 이벤트를 갖고…” 식의 과장된 자랑도 덧붙여질 것이고….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왜 꼭 아내와 함께 주말을 보내야 하나요?”

주말 얘기와 관련해 부인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요청에도 ‘노(No)’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쁘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주말 얘기에 부인을 개입시킬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 진짜 이유인 듯 했다.

“주말에는 각자 하고 싶었던 일을 해요. 부부동반 파티에 가야하거나 둘이 함께 하고 싶은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했다면 모를까.”

아르젤 부부의 관심사는 판이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즐거워야 하는 주말을 억지로 ‘같이’ 보내며 즐겁지 않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의 부인 파멜라 아르젤(38·외국인학교 교사)은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사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웃고 떠들고 먹으면서 즐거움을 찾는 타입이다.

반면 아르젤 사장은 즐기는 놀이도 고루고루, 다니는 곳도 이곳저곳이어야 직성이 풀린다. 강박관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운동 한두 가지, 문화생활 한두 건, 사교생활 등의 카테고리를 주말 동안 두루 즐긴다는 나름의 규칙을 갖고 있다.

등산한 뒤라면 가볍게 극장에서 영화를 한편 보고 친구들과 어울려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눈다. 조깅 후 집 근처 화랑에 들른 뒤 아내, 아이들과 친구집에서 간단한 모임을 갖는 식이다. ‘메뉴’는 매번 바뀌지만 코스의 내용은 동일한 셈.

‘금발의 악동들’이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다섯 살, 네 살의 아들 이안과 엘리엇은 부부의 주말 스케줄에 따라 데리고 있기 편한 쪽이 맡는다. 하지만 “어디를 가야 재미있는지 안다 (They know where fun is)”는 아르젤 사장의 말대로 아빠를 따라 야외로 발걸음을 옮기는 때가 많다.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달려 대서양까지 이르는 길. 이 길을 따라 프랑스 본토의 끝자락 대서양변에 이르면 브르타뉴 지방과 그 속의 작은 고도(古都) 카냑을 만난다. 짭조름한 바다냄새와 농익은 태양이 평일에조차 여유로운 휴일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아르젤 사장은 카냑에서 바닷바람에 머리를 적시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휴식, 여가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생활태도를 익힌 그는 “프랑스인들은 멋진 주말을 보내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오래전에 고향을 떠났지만 아직도 고국의 ‘휴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비행기에서 찾아낸 섬

주말에 찾는 가장 만만한 산책코스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집 근처인 남산이다. 아들들과 함께 평평한 땅을 골라 미식축구를 하고 조깅을 즐긴다. 한달에 2,3번은 찾는다는 북한산은 자연의 호흡이 필요할 때 꼭 들르는 곳. 덕분에 야간산행에도 길을 잃지 않을 만큼 샛길까지 익힌 ‘북한산 도사’가 됐다. 남한산성길 산책과 서울대공원 동물원 찾기도 포함된다. 보다 격렬한 운동이 필요하다면 아차산에서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스키장에서 스노보드를 즐긴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 주말을 보낸
프랑스 브르타뉴 별장 근처

인천 옹진군 북도면 4개 섬 가운데 하나인 ‘신도’도 그가 즐겨찾는 곳이다. 그만의 사연이 있어 더 애착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는데 창문 밖으로 작은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요. 동료들에게 물어 봤는데 다들 잘 모르더군요. 지도를 뒤지고 물어 물어 위치를 알아냈어요. 섬으로 가는 여객선도 있는 아주 멋진 곳이죠. 고향을 닮기도 했고….”

아르젤 사장 가족은 올 초 해맞이도 이 곳에서 했다.

도심에서 즐겨 찾는 곳으로 첫손가락에 꼽는 곳은 아트선재센터. 현대 갤러리, 가나아트센터도 좋아한다.

파리 본사에서 7년 간 근무하던 때도 그는 박물관 기행을 즐겼다. 루브르박물관, 퐁피두 센터, 아시아 작가들의 예술품을 전시하는 기메 박물관,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으로 유명한 오르셰 박물관이며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가 잠시 살았던 아프리카의 추억을 되살리게 하는 데퍼 박물관도 주요 동선(動線)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각종 공연도 꼭 챙겨보곤 했다. 하지만 유명 작품의 경우 공연 한 달 전쯤 예약하지 않으면 일찌감치 표가 동나버리는 한국에서는 극장 찾는 재미를 포기한 지 오래다.

●금요일술자리가주말을 망친다

샐러리맨 중 일요일을 길게 느끼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운동 문화생활 여행 가운데 단 하나도 제대로 못한 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기 십상이다. 아르젤 사장은 한국인들이 특히 하루뿐인 일요일의 휴식을 망치는 이유로 금요일에 집중되는 술자리를 지목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술을 즐겼어요. 독한 소주도 잘 마시고. 하지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는 문화는 싫어지더라고요. 프랑스는 대개 어느 정도까지 즐긴 후에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아요. 주중에 술을 줄이면 주말이 길어진다니까요.”

인터뷰가 진행된 것은 수 목요일 오후. 그는 주말 계획을 완벽히 세워놓고 있었다. “금요일 밤에는 부부동반 친목 파티가 있어요. 치즈와 와인이 곁들여진 파티죠.” 또 있었다.

“토요일에는 혼자 베어스타운으로 스키타러 갈 거고 돌아오면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야겠네요. 일요일에는 아이들과 서울대공원에 가기로 했어요. 오후에 남산에서 조깅 한 번 하면 피로가 싹 가실 것 같은데요.”

로레알 파리, 랑콤, 비오템, 슈우에무라, 헬레나 루빈스타인, 메이블린, 랄프로렌 향수 등 유명 화장품 브랜드들의 총본사인 로레알그룹은 최근 들어 한국시장에 주목하고 있다. 덕분에 아르젤 사장도 ‘휴일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조와는 달리 요즘은 가끔 일요일 오후에도 출근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대신 주중에 대부분의 일을 마무리한다는 생각을 해야 마음이 홀가분해요. 주중에 일할 땐 일에만 집중해야죠. 사실 그 메이크업 라인도….”

주말 얘기를 하다말고 자꾸만 회사 얘기, 상품 자랑으로 빠져버리는 이유는 ‘주중 인터뷰’라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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