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일년 내내 곳곳에서 계속된다. 지난 1월 말에는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도시 앙굴렘에서 제 29회 국제만화축제가 열려, 이미 ‘제 9 예술’로 격상된 만화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번 29회 앙굴렘의 대상은 ‘어둠의 도시’의 벨기에 만화가인 프랑스와 슈히텐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수상 소감 첫마디는 30년 죽마고우이자 오랜 파트너로 함께 일해온 시나리오 작가, 브느와 피터스에 대한 감사의 말이었다. 스토리만화(코믹스)와 토막풍자만화(카툰)를 포함한 모든 만화를 프랑스어로는 ‘방드데시네’, 혹은 줄여서 BD(베데)라고 부르는데, 특히 이야기만화의 경우 만화가와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이 나뉘어져 있어 좋은 BD가 만들어지려면 이처럼 그림쟁이와 이야기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프랑스에서는 이야기 만화책을 지칭할 때 책이 고급스럽게 장정돼서 그런지 흔히 ‘앨범’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번 앙굴렘 축제에서 우리의 눈길을 끌었던 또 다른 앨범은 프랑스의 중견 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민중의 절규’, 제 1부 ‘3월 18일의 대포’이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타르디는 데생부분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그의 그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평이 나있는 터라, 수상소식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이 앨범의 이채로운 점은 ‘소설과 만화를 접목시키려는 시도’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민중의 절규’는 1871년 파리코뮌을 무대로 한 장 보트렝의 역사추리소설(1999, 그라세 출판사)을 각색한 앨범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활자 예술에 시각 이미지를 가미하는 실험을 해왔다. 셀린느의 작품에 중량 넘치는 흑백 삽화를 그려 넣어 고전적인 플레이야드 판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의 영상소설(갈리마르 출판사)로 바꿔놓았고,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활자 소설을 이미지 중심의 만화 텍스트로 각색하는 실험에 뛰어 들고 있는 것 같다. 진지한 독자들이라면, 타르디의 앨범과 보트렝의 원작 소설을 나란히 펼쳐놓고, 두 텍스트 사이의 변화를 꼼꼼히 추적해 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상 각 장르의 예술은 스스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과감하게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발전해왔다. 문자의 발명과 함께 일찍이 활자 예술로 자리잡은 문학도 계속 다른 예술들과의 만남을 시도해 왔다. 특히 이야기 문학인 소설은 무대 예술인 연극으로 올려지기도 하고, 다시 음악의 도움을 받아 오페라와 뮤지컬로, 또 20세기 들어 종합예술인 영화로 그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소설과 만화의 만남은 둘 다 종이 예술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만남보다 덜 이질적이다. 두 장르의 혼혈은 그만큼 손쉽고, 더욱 밀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21세기가 종이 예술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르네상스이기를 기대한다면, 소설과 만화를 뒤섞는 타르디와 보트렝의 시도를 일회용 실험 정도로 가볍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임준서(프랑스 LADL자연어처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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