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하게 말하자면 ‘내가 요즘 읽는 책’의 주종은 ‘흥부와 놀부’, ‘아기돼지 삼형제’, ‘미운 오리새끼’ 등의 동화류였다. 다름아닌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방학과제 때문이다. 아직 독서록이 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아이가 두어 시간 동안 빈 공책을 앞에 놓고 무얼 어떻게 써나가야 할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평소의 소신은 무너졌다. 함께 책을 읽고 불러 주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하며 제 스스로 이루어 내는 것의 소중함을 제껴둔 채 애오라지 성과만을 채근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필기와 암기에만 능숙할 뿐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는 것을 난감해 하는 대학교 3, 4학년들을 만났을 때 비슷한 분노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분노는 너와 나, 개인과 구조 모두가 희생자인 동시에 공범이요 책임자라는 회의와 자책이다. 십수년 동안의 교육을 받고서도 앎에 다가가는 자세가 초등학교 1학년 아이와 매한가지라면, 우리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민주시민을 길러내고 있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스스로 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 역시 낯선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토론과 의견조정이라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민주주의와 관련해 자주 지적되곤 하지만, ‘스스로 의식’이 약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 서양학자는 이성적 사고와 비판적 토론으로 공공의 문제에 대해 민주주의적 합의를 이루었다는 근대적 신(新)인류의 전범(典範)을 서유럽 부르주아로 보았다. 영국에서의 나의 경험, 즉 교수와 거침없이 주고받는 학생들의 싱싱한 의견들이라든가 정규방송으로 중계하는 국회 안에서의 논리적인 공방과 웃음들, 토론 프로그램들에 등장한 보통사람들의 발언들은 이 학자의 견해를 충분히 증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자화자찬에 마냥 편승하고 싶지 않은 동양인의 자존심 때문이랄까, 탈감정적 탈사익적(脫私益的)으로 건조된 부르주아의 신화적 지위를 끌어 내리고 싶어 이 책 저 책 찾아 보았지만 딱히 대놓고 흠잡을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풍속의 역사: 부르주아의 시대’ (에두아르트 푹스, 2001, 까치)는 그러한 미련을 다소나마 줄여주었다. 이 책에 담긴 공공선(公共善)을 향한 이성으로 치장한 근대 부르주아의 이면, 즉 그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즐긴 자본주의적 향락과 방탕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과 그에 대한 분석은 인류와 인류문명에 대한 보편성 확인과 함께 이 시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혼동스런 얽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줬다.
아이의 독서록 과제를 하며 생겨난 나의 분노는 이 책을 통해 우회적 희망으로 바뀌었다. 부르주아도 별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광기와 탐욕으로 혼란스러운 우리 사회의 비판적 토론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지나친 역설일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종 서열과 인연에 따른 눈치보기가 그들과는 달리 우리의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이면에 구겨져 있는 이성을 전면으로 끌어내는 작업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우리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과제일 것이다.
김세은(연세대 언론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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