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회장의 출국에 대해 “유력 정치인 C씨의 만남 제의를 거절하기 위해 해외출장으로 명분을 삼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 무성했다. 일부에서는 “A사가 정치권과의 단교(斷交)를 선언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난무했다.
A사 측은 “정치인을 피하기 위한 출장이란 말은 호사가(好事家)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며 극구 부인했지만 여전히 이런 관측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예전 같으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계의 줄대기와 정계의 돈줄 잡기가 한창이겠지만 요즘은 재계와 정치권 사이에 흐르는 냉기류가 어느 때보다 강하다. 오히려 기업들은 있던 ‘줄’마저 잘라버리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번 선거에는 ‘국물’도 없다”는 식의 성명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일선 기업들은 ‘정치권과의 고리 끊기’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이 때문에 정치권은 막대한 선거자금을 이제 어디에서 조달해야 할지 ‘속앓이’를 한다는 소문도 적지 않다.
▽재계, ‘정치권과의 거리 두기’ 움직임 뚜렷〓삼성은 지난달 인사에서 구조조정본부의 한 핵심 임원을 계열사로 ‘원대복귀’시켰다. 정·관계에 넓은 인맥을 형성한 그는 그동안 정치인 후원회에 참석하는 등 삼성의 대외업무 중 일부분을 담당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대선을 앞두고 현업으로 복귀하자 재계는 “삼성이 ‘정치권과의 거리 두기’를 선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 삼성 관계자는 “계열사 임원과 사장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특정 정치인을 후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룹 차원의 정치인 지원은 힘들다고 봐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업들도 삼성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삼성이 가는 방향이 크게 틀리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LG도 이번 선거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범위 내에서만 정치적 후원을 하겠다는 내부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의 한 소식통은 “LG에서는 ‘당분간은 여야(與野) 어떤 정치인사와도 접촉을 삼가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도 일단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생각이다. 다만 일부 조직을 정비해 정치권 관련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해 사안별로 대응한다는 방침.
▽재계, “법이 허용하는 정치자금만 주겠다”고 공식 선언〓재계는 이달 들어 연일 “대규모 정치자금 지원은 지난 대선으로 끝났다”며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기대심리를 원천 봉쇄했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SK 손길승(孫吉丞) 회장. 손 회장은 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앞으로는 정당한 정치자금 요구만 응하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전경련은 8일 회장단 회의를 열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당하고 투명한 정치자금만 제공하고 정당하지 못한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기업 자율실천사항’을 의결했다. 16일에는 “전경련이 정치자금을 공동 모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전경련이 ‘윤리 경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정치권에 음성자금을 주지 않겠다는 뜻과 관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올해 선거가 정경유착 관행 근절의 고비〓재계가 정치권을 멀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선 자금이 문제되는 상황에서 굳이 특정 정치세력에 뒷돈을 대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공감대 때문. 상당수 대기업 총수가 정치자금 문제로 법정을 드나들었던 ‘아픈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투명경영’이 점차 자리잡아 가면서 비자금 조성이 힘들어진 것도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전경련 손병두(孫炳斗) 상근부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경영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투명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수십억원씩 정치자금을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개별 기업이 정치인들과 적절히 교류할 경우 여러 가지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엔 합법적인 정치적 후원으로도 얼마든지 그러한 친분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정치권 분위기도 바뀌어 가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자금 수요를 해갈(解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치자금 지원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대선을 치르려면 거액이 필요한 정치현실에서 합법적인 정치후원 만으로는 자금 조달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 때문에 주요 기업들이 대선 과정에서 여야에 최소한의 ‘보험료’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김영래(金永來)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고비용 정치구조를 개혁하지 않고는 합법적으로 정치권의 자금수요를 해결하기는 사실상 힘들다”며 “하지만 지금 재계에 불고 있는 ‘정치색 빼기’ 작업은 정경유착 고리 차단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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