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영한씨와 딸의 대화 "아빠의 진솔한 삶 사랑해요"

  • 입력 2002년 2월 19일 15시 44분


늦겨울 해가 뉘엿거리는 오후.

북한산 기슭 대폿집에 어느덧 중견의 무게가 느껴지는 작가와 미술대학에 다니는 딸이 마주앉았다. 정글의 진창 속에서 전투를 치르면서도 소설을 생각했던 ‘베트남세대’와 힙합과 재즈가 난무하는 ‘홍대앞 세대’. 서로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작가 박영한은 막걸리를, 딸 낭이는 맥주를 앞에 놓고 ‘서로의 세대읽기’를 시작했다.

낭이는 연작 ‘왕룽일가’에 나오는 작가의 딸 ‘나리’의 실제 모델. 홍익대 미대 도예과 2학년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신의 일기를 ‘낭이의 일기’로 출판하기도 했다.

# 익숙함 깨기

“아빠 술 마시고 고함치는 것 안보니 속 시원하지?”

아빠는 짐짓 최근 자신의 도피행으로부터 딸의 속마음을 읽으려고 시도한다. 박영한은 요즘 전주 모악산 기슭에 방 한 칸을 얻어두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나는 새로운 글쓰기를 할 때마다 집을 떠나는 습관이 있는데 일종의 ‘익숙함 깨기’인 셈이지. 친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창조야.”

익숙하면 깨버린다는 아빠의 창작 습관은 창창한 앞날을 살아가야 할 딸에게 주는 암시이기도 했다. ‘범생이’(모범생을 일컫는 속어)가 되기를 바라는 일반 부모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낭이의 대답도 만만치 않다.

“솔직히 시원한 점도 있어. 어릴 때 술 드시고 들어오는 날 밤이면 노래부르고 고함치고 해서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불안에 떨었던 거 아빠는 아나?”

“항상 도심 주변을 떠돌았고 지금도 피 속에는 방랑벽이 흐르지만 한번도 가족을 짐으로 생각한 적은 없단다.”

# 요즘 젊은이는 뭘로 고민할까

“낭이는 방학인데 무슨 생각하면서 지내냐?”

보릿고개도, 데모 구호도 없는 요즘 신세대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시대고(時代苦)가 있을까.

“새학기면 3학년이 되는데 앞으로 뭘해먹고 살아야할지 졸업 후 진로가 제일 걱정이지 뭐. 전공이 도예인데 이걸로는 취직이 어려워. 아빠가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봐왔는데 예술로만 살기에는 아직은 우리 사회가 가혹한 것 같아.”

“아빠도 순수예술 한답시고 고생하고 있는 처지에 자식에게 인문학이나 순수미술만 하라고 강요하기는 어렵구나. 그래도 아빠는 너나 노아(아들)나 다른 학생들에게도 좋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해 평생 후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소설 쓰는 아빠로 인한 가족의 고생을 알아서일까. 취직이냐, 예술이냐를 놓고는 오히려 낭이가 더 실속파다.

“순수미술은 고달퍼. 우리 과에는 작가가 되려는 학생은 1명 정도 있을까말까 해. 나머지는 졸업 후 취직 잘되는 쪽을 찾는 분위기야. 친구들을 봐도 연애보다 취업이 훨씬 심각한 고민거리야.”

대화가 무르익어 가면서 ‘부모〓보수적, 신세대〓자유분방’이라는 도식이 무너져 내렸다. 두 부녀의 대화는 ‘부모〓자식에 대한 이상주의자, 신세대〓실속형 현실파’가 올바른 세대 정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제도적 간섭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 내부의 목소리를 쫓아가라. 그 목소리에는 필시 운명적인 힘이 들어있거든. 사실 아빠도 문학보다 그림이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가난 때문에 돈 안드는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거지. 낭아, 지금은 절대빈곤은 사라졌잖니. 세대감각에 맞게 자유롭고 발랄하게 자기 하고 싶은 길을 찾아가라.”

“아빠 만큼 예술적 재능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적성만 갖고 살기에는 너무 힘들어. 휴학하고 취직 잘되는 디스플레이 패션 가르치는 산업디자인 학원에 다닐까 고민중이야. 그래도 아빠가 몸으로 보여준 삶을 존경해.”

인생의 방향타를 정하는 데 부모는 가장 좋은 레퍼런스(참고자료)다.

# 연애따로 결혼따로

예나 지금이나 성 문제는 세대간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 특히 섹스에 대한 태도에서 세대간 유일한 공통점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고 인정하는 정도일 뿐이다.

“요즘 어른들은 젊은이들보고 성관념이 없다, 문란하다고 하는데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실제 어떤 정도니?”

“지방 학생들 중에는 하숙비도 아낄 겸 동거하는 아이들도 아주 많거든. 결혼은 서로 생각도 안해. 나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면 이런 동거도 괜찮다고 생각해.”

물론 낭이가 말하는 책임은 아빠 세대의 ‘상대방의 인생에 대한 사후 책임’이 아니다. ‘헤어져도 울며 매달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컨트롤’이다.

아빠는 한발 더 나간다.

“나는 옛날부터 성이란 음식이나 술 담배 같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변함 없어. 기성세대들은 다 먹고 마시는 것을 젊다는 이유만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안되지. 어때 이 정도면 굉장히 파격적이지?”

그렇지만 노파심이란 이름의 사족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나이는 돼야겠지. 25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애들은 조숙해서 조금 낮게 잡아야 하나?”

아무리 리버럴해도 나이 찬 딸아이를 가진 부모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결혼이다.

“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냐? ”

“나도 헷갈려. 머릿속에는 집안 학벌 인물 같은 객관적인 기준을 봐야지 하면서도 막상 남자다운 사람을 보면 마음이 혹하거든. 아빠가 고생하는 것을 봐서 그런지 마음씨 좋고 매력있는 남자는 친구로는 좋지만 남편감으로는 피하고 싶어.”

예술정신과 자유분방을 외치던 아빠도 여기서는 아무 말이 없다.

아프고 질펀한 현실을 소설로 풀어내는 아빠와 예리한 손놀림으로 도자기를 빚어내는 딸.

어둠이 깊어가고 막걸리 그릇과 맥주컵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지면서 ‘너에게 이런 점도 있었구나’ ‘아빠가 그때는 그랬구나’라는 속삭임의 횟수도 늘어갔다.

▼작가 박영한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 통음, 하루 2갑이 넘는 흡연, 집을 떠난 외로운 책읽기와 글쓰기….

작가 박영한(朴榮漢)의 요즘 일상이다. 몸 전체에서 귀기(鬼氣)가 느껴진다고 말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한바탕 웃는다.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50대 중반이지만 아직 강렬한 눈빛만은 청년시절 그대로다.

박영한은 1947년 부산 거상(巨商)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고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가정교사 막노동 자살미수 등을 경험했다. 사회의 진창을 전전하며 울분에 찬 어두운 나날을 보냈다.

베트남에 건너가 백마부대에서 보도병으로 근무했다. 이 때의 경험이 녹아있는 ‘머나먼 쏭바강’으로 1977년 등단했다. 이 작품으로 제2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이후 경기도 덕소 김포 능곡 안산 등 도심외곽을 전전했다. 이 기간의 체험은 장편 ‘왕룽일가’‘우묵배미의 사랑’‘우리는 중산층’ 등의 소설로 세상에 나왔다. 변두리 인생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풀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동인문학상, 연암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받았고 작품이 TV인기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가가 되었다.

마흔이 넘은 89년에야 북한산 기슭에 한 칸 짜리 작업실을 마련해 정착했다. 부산동의대 한국어문학부 문예창작과 교수. 인터넷 문학창작캠프(www.novel21.com)를 열어 후진도 양성한다.

알레그로 포르테(빠르고 힘차게)의 필체로 젊은이들의 에로스를 그려낼 작품을 구상중이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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