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대통령의 성적표

  • 입력 2002년 2월 22일 18시 13분


이틀이 지나면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꼭 4년이 된다. 권좌에 오르기까지 그가 겪어온 인간적 고초와 정치적 역정들을 생각할 때 취임 이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4년의 세월을 놓고 국민과 함께 영광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여길지, 아니면 길고 긴 고난의 길을 힘겹게 끌려왔다고 느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김 대통령 역시 당선될 때 그렇게 높던 지지도를 임기 말에 다 잃은 채 초췌한 형국으로 청와대를 떠나야 했던 역대 다른 대통령의 퇴임 1년 전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권 초기에는 80%가 넘는 지지를 받다가 최근에는 중립적 선택까지 합해 겨우 30%대에 턱걸이하는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 이를 말해준다. 심지어 어떤 조사에서는 김 대통령의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합한 것이 19%에 불과했는데 이 수치는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군사독재자들의 말년 지지율에 비해서도 초라한 수준이다.

▼초라해진 정권지지율▼

취임 초와 임기 말에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의 편차가 천양지판으로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국민의 마음이 유난히 옹색하고 포용력이 없어서 지도자가 하는 일에 쉽게 실망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실정(失政)의 정도가 심했단 말인가. 선을 그어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답 얻기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통계의 객관성과 비교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정부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어느 언론매체가 정기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통해 DJ의 지지도가 오르내린 시점에서 빚어졌던 일들을 대입해 보면 ‘아, 이게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구나, 우리 국민이 그렇게 감정적인 존재들만은 아니구나’ 하는 결론을 얻게 된다.

예컨대 99년 초만 해도 67.3%의 지지를 받던 김 대통령은 불과 3개월 뒤인 그 해 4월, 세풍사건을 이유로 야당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국회에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즈음 지지도는 44.5%로 수직하강했다. 여당이 완벽하게 야당의 멱살을 잡은 상황이었지만 민심은 정권이 요구하는 대로 야당의 잘못을 나무라기보다 오히려 매를 든 정부여당 쪽에 눈을 흘겼다(때마침 미국에 도피 중이던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체포돼 대선정국을 앞둔 여당은 세풍사건 2라운드에 대한 기대로 자못 흥분된 모습이지만 글쎄 99년의 선례를 볼 때 국민이 그 꿈에 얼마나 호응해 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어 99년 8월 옷로비 사건이 터졌을 때, 의혹의 핵심인물인 김태정 당시 법무장관을 유임시킨 시점에서도 여론은 여지없이 정권에 등을 돌려 지지율을 31.2%로 깎아 내렸다. 당시 김 대통령은 “여론이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며 민심을 질타했지만 훗날 김태정씨가 물러날 수밖에 없을 만큼 큰 잘못이 속속 입증된 것을 보면 이 나라 국민은 어쩌면 대통령보다도 더 앞서서 진실을 보는 혜안을 가졌단 말인지 그저 신통하기만 하다.

이 두 사례는 정권이 가해자 입장에서 여론에 반하는 일로 민심에 맞설 경우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경제와 정권지지율간의 상관관계다. 대개 경제가 좋아지면 정부지지도가 오를 것으로 짐작하지만 경제상태를 가장 예민하게 나타내는 종합주가지수와 당시의 지지도는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즉 그 해 3월, 500 수준에 불과하던 주가지수는 정권 지지도가 절벽 아래로 내리꽂히던 4월과 8월에 각각 700과 900을 뚫고 폭등장세를 연출했던 것이다.

▼어정쩡한 선심정책 안통해▼

주가가 800선에 육박할 만큼 활황세를 보이는 요즘 대통령 친인척과 아태재단이 개입한 게이트들로 정권의 인기도가 바닥 모르게 추락하고 있는 것은 국민의 분별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대선을 앞두고 어정쩡한 선심성 경제정책들로 여당에 표를 보태주려는 얕은 수가 통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기라는 게 지도자가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절대 가치는 물론 아니다. 그 자체가 목표이기보다 한 일에 대한 성적표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점수에만 집착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졸업반 성적표’가 퇴임 후에도 꼬리를 달고 다니며 전직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향후 1년을 무심하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DJ 자신은 업적에 비해 지지도가 낮다고 야속해할지 모르지만 평가하는 쪽 생각은 또 다르다. 그래서 어차피 극적으로 오를 것 같지 않다면 정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앞으로 1년간 그나마 지금의 점수라도 지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아태재단의 망령이 발목을 잡기 시작해 그것도 쉬워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이규민기자·논설위원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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