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富川노인 외국어봉사단'…"연륜으로 사로잡아요"

  • 입력 2002년 2월 26일 18시 36분


경기 부천시 상1동 복사골문화센터 자원봉사자 사무실. 매주 금요일이면 이 곳에는 백발의 노인들이 3∼4명씩 짝을 이뤄 두꺼운 사전과 복사물을 펼쳐 놓고 공부에 여념이 없다.

노인들은 다음달까지 부천시내 모 병원의 홍보자료를 일본어로 번역하느라 모임 분위기가 마치 대학생들의 ‘스터디 그룹’처럼 보인다.

전문용어가 많아 애를 먹기는 하지만 수십년의 연륜 덕분에 수월하게 풀어 나간다.

현재 24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는 2000년 12월 정식 발족한 ‘부천노인외국어봉사단’. 말 그대로 입회자격이 만 60세 이상으로 제한되는 노인 자원봉사 모임이다. 중학교 교사, 외국기업 근무, 해군 통역관, 학원 강사 등 회원의 경력은 다채롭다.

그렇지만 누구나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국어 통역이나 번역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에 회원이 되려면 까다로운 자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자연히 실력도 수준급.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국제행사에서 한 몫을 하는 것은 물론 개인이 의뢰한 문서 번역에 이르기까지 일을 가리지 않고 한다.

간혹 ‘노인네가 무슨 번역…?’하며 의구심을 표시하던 사람도 ‘봉사단의 과거 업적’을 보여주기만하면 흔쾌히 일을 맡긴다.

최근 독일인 바이어 상담 때 봉사단의 도움을 받은 ㈜아폴로산업 이용관 부장(46)은 “처음 맞는 외국 바이어라 난감했는데 큰 도움이 됐다”며 “역시 풍부한 경험과 노련함이 최고”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회원들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며 별 것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800시간이 넘는 자원봉사의 공로로 지난달 22일 ‘자랑스런 부천의 얼굴’ 수상자로 선정된 조연채씨(69)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남을 돕는 보람은 해 본 사람만 안다”고 말했다.

이 단체 최고령자인 민청옥씨(81·부천시 중동)도 “자원봉사는 남을 위해 내가 가진 재능을 쓰는 것일 뿐”이라며 “작은 번역일이라도 힘 닿는데까지 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1주일에 한 번 사무실에 모이면 일거리를 나누는 것 외에 저녁 늦도록 갖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이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 결론은 항상 똑같다. 정년 퇴직을 이유로 자기 능력을 마냥 썩혀야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분명 잘못됐다는 것.

전창해 회장(73)은 이를 두고 “사실상의 고려장 제도나 마찬가지”라며 “있는 자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전회장은 또 “노인자원봉사 활성화의 전제조건은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이라고 말한다.

외국 선진국에 비해 국내 노년층의 자원봉사 활동이 저조한 것은 항상 ‘내일의 먹거리’를 걱정해야 할 만큼 노후보장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설명. 이런 이유로 이 단체 회원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노년에 자원봉사를 할 수 있을 만큼 혜택받은 사람들’이라며 월드컵 기간에도 크게 기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박승철기자 parkk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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