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놀이 월드컵'을 만들자

  • 입력 2002년 3월 12일 18시 17분


지난달 말 프랑스 출장에서 흥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밤 기차가 잠시 멈춘 시골 마을은 인적 드문 평온한 동네였다. 그런데 한 군데 야외등이 켜진 간이축구장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유니폼을 착용한 아마추어 선수들이 희미하게 밝혀진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었다. 벽지 마을에서 지펴지는 축구열기, 그것이 우승국의 비결이었다. 프랑스 온 국민이 지난번 월드컵대회 우승의 영광을 재현해줄 월드컵 경기대회 개막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월드컵대회가 이제 79일 앞으로 다가왔다. 두 달 반을 앞두고 정부와 민간단체들은 준비작업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흥이 나질 않는다. 아니 흥 돋울 스타도, 행사도, 분위기도 없다. 범세계적 스포츠로 발전한 축구행사를 치르는 나라의 분위기가 이렇게 썰렁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외국인의 눈높이 모른다˝▼

88올림픽경기대회 때에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손에 손잡고”를 괜히 흥얼거리며 다녔다. 그런데 미국의 유명 여가수가 불렀던 것으로 기억되는 월드컵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요즘 초중고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는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퍼진 것으로 알려진 원색적인 반미 감정을 담은 욕설조의 가락이다.

선수들의 동작 하나에, 작은 공의 미세한 움직임에 세계인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풍경은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세계인의 이목이 이만큼 집중되는 행사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그 틈새를 비집고 ‘문화대국’ ‘IT강국’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홍보하려는 전략을 짤 법도 하다.

그런데 이 전략을 한국 방문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월드컵이라 해도 축구경기를 보러 온 것이지 한국의 문화와 산업을 견학하러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축구는 본질적으로 ‘놀이’이고, ‘잔치’이며, ‘향연’이다. 선수들의 묘기와 공방전을 보면서 한바탕 흥겹게 소리지르고 놀기 위해 축구장을 찾는 것이다. 오죽하면 이 놀이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는 훌리건들까지 탄생했겠는가. 그러니 한국을 찾을 40만명의 외국인들에게는 잔치를 베푸는 호스트의 자세로 임해야 하며, 그들이 흥겨워할 놀이마당을 펼쳐주는 것이 중요하다.

축구는 본질적으로 중 하층민의 경기이며, 직업으로는 노동자, 연령으로는 10대와 20대가 열광하는 스포츠다. 짐작하건대, 체육 관련 임직원과 비즈니스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내왕객들이 그런 유형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맞는 놀이문화와 무대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전통부채춤이 태국의 손톱춤, 중동의 배꼽춤보다 아름답다고 아무리 선전해봐야 그들이 흥을 못 느끼면 그만이다. 어디 가서 술 한잔 걸치고 축구장에서 못다 푼 여흥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동방예의지국의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면 낭패가 될 것이다. 축구 열기가 술, 춤, 집단응원과 어우러지는 것이 외국의 방식이라면 부담 없이 한잔 할 포장마차, 넋 놓고 연인과 함께 흔들어댈 디스코텍, 한데 어울려 고성방가할 수 있는 선술집을, 또는 그것을 한데 합친 종합사교장을 그들은 더 아쉬워할지 모른다.

정부와 시민단체에서 펼치는 ‘친절, 질서, 청결’이 잔치의 기본 여건이라면 오락, 음주, 댄스가 잔치의 콘텐츠가 되어야 한다. 브라질인은 삼바춤 클럽을 그리워할 것이고, ‘골루아즈’(담배)에 중독된 프랑스인은 금연식당을 기피할 것이며, 중국인은 안동소주 말고 순도 60도의 고량주를 찾을 것이다. 노천카페를 찾는 사람들에게 지하다방은 감옥이고, 재즈바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조용필은 낯설기만 할 것이다.

월드컵 한달 동안 한번쯤 그들과 같이 돼서 신나게 놀아주는 것이 어떨까. 참가국의 대중문화와 생활양식을 불편 없이 깔아주는 것이 개최국의 최대 임무다.

▼엄숙주의론 흥 못돋워▼

월드컵 개최도시 어디에도 아직 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놀이문화가 빠진 탓이다. 청소년들이 열광하지 않는, 오직 ‘16강 진입’만을 입시 치르듯 고대하는 월드컵에 흥이 날 리 없다. 월드컵 열광이 단순한 들뜸이 아니라 미래개척의 의지를 촉발하는 희망의 에너지라면, 그것은 타 국민과의 거부감 없는 교감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이쯤해서 ‘문화 월드컵’을 ‘놀이 월드컵’으로 전환하는 것이 어떨까. 축구와 고급문화는 어쩐지 서먹서먹한 관계이며, 질서와 청결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월드컵 잔치에 괜스러운 긴장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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