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커녕 동네도 정복한 일이 없는 내게도 그런 흥미를 느끼게 해준 책이 있다. 예컨대 모나코 출신의 빌리 클뤼버가 쓴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창조집단 시빌구)가 꼭 그랬다. 클뤼버는 파리 예술가 공동체의 기록 사진을 수집하다가 익명의 아마추어 작가가 찍은 스냅 사진 5장을 구했다. 그는 이 사진과 같은 날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찾아 나서 모두 29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에는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 장 콕토 등이 등장했다. 클뤼버는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이 사진들이 1916년 늦봄이나 여름에 찍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대부분은 여기서 추적을 멈출 테지만 클뤼버는 파리 경도 조사국에서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진 속 건물의 그림자 각도를 계산해 그 날이 8월 12일이라는 사실과 각 사진을 찍은 정확한 시간까지 알아냈다. 클뤼버에 따르면 그 29장의 사진은 1916년 8월 12일 오후 12시 45분부터 4시 30분 사이에 찍었다. 그리하여 클뤼버는 “1916년 8월 12일 토요일은 섭씨 27도의 따뜻하고 햇살 좋은 하루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을 한 권 쓸 수 있었다.
이 지루한 추적 과정과 사진 설명을 읽다 보니 왜 나폴레옹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극동의 섬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어째서 류큐를 일컬어 ‘그런 곳이 있다면 천국’이라고 말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런 소용도 닿지 않는 그 쓸데없는 얘기가 쓸쓸한 나폴레옹을 달래줬을 것이다. 내 처지와는 무관한 클뤼버의 책을 읽으며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듯이.
청나라 사람 장조의 ‘내가 사랑하는 삶’(태학사)을 읽노라면 옮긴이 정민 교수가 덧붙인 글이 눈에 들어온다. “명나라 때 이장형은 호수 위의 산들을 사랑하여 ‘산 꼭대기마다 1년씩 머물렀네(每箇峯頭住一年)’란 구절을 남겼다.”
먼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 집요하게 뭔가를 추적하는 사람들, 산 꼭대기마다 1년씩 머무르는 사람들.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쓸모 적은’ 얘기가 때로 우리를 달래줄 때가 있다.
김연수 소설가 larvatus@netian.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