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동아서울국제마라톤을 완주한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씨(33)는 4시간54분22초의 기록으로 골인지점에 들어오자마자 펑펑 울기 시작했다.
유씨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40년 제12회 도쿄올림픽에 나갈 예정이었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외할아버지 양임득(梁任得·80년 68세로 작고)씨의 한(恨)과 열정을 체험하기 위해 동아마라톤에 참가했다. 일제강점기 손기정(孫基禎) 선수와 함께 조선의 마라톤 기대주였던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미리(美里·아름다운 마을)’라는 이름을 지어준 분이다.
오전 10시. 긴장한 나머지 화장실을 급히 다녀온 그가 엘리트 참가자들 뒤에 서는 순간, 출발 신호가 울렸고 유미리의 ‘삶의 레이스’는 시작됐다.
지난 2개월 간 유씨에게 마라톤을 가르쳐 준 선수 출신의 사토 지에코(33)도 함께 발걸음을 내디뎠다. 2개월간 일주일에 두세 번 뛰어본 그에게 풀 코스는 힘들게 다가왔다. 그동안 뛰어본 가장 긴 거리가 겨우 20㎞.
출발 후 17㎞ 지점에 이르자 첫 위기가 닥쳐 왔다. 평소 좋지 않던 무릎의 관절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시작됐다. 군자교를 건너 200여m를 달리다 말고 인도의 가로수를 부여잡았다.
“그만 하지? 평소만큼 뛰었어.”
사토씨가 무릎을 걱정하며 만류했다.
“몸은 뛸 수 없어. 하지만 심장은 뛰잖아.”
사토는 묵묵히 무릎 보호 밴드를 유씨의 정강이뼈 주위에 감았다. 이때부터 유씨의 보폭이 눈에 띄게 줄었다. 23㎞ 부근인 잠실대교를 건널 때는 자꾸 어깨를 들썩였다. 피로성 견통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
30㎞ 지점인 길동사거리에 이르러 그는 다시 가로등에 기댔다. 주위의 카메라에도 아랑곳않고 유씨와 사토씨는 스트레칭을 했다. 양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누르며 허벅지 근육을 풀었다.
다시 레이스가 시작됐다. 무릎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이제 보폭은 겨우 운동화 한 개 반 정도.
학여울역, 38㎞ 지점을 통과하면서 그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머릿속으로 뭔가에 골몰하는 듯했다. 유씨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동행 취재한 일본 TBS방송팀은 “20㎞ 정도에서 그만둘 것”이라며 모든 촬영 포인트를 그 지점에 맞췄다. 그러나 유씨가 20㎞선을 넘어 계속 뛰자 이들은 “그래도 완주는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1호차 빨리 메인스타디움 가서 대기해! 완주한다!”
4시간54분22초. 그는 드디어 골인지점을 넘어섰다. ‘완주’였다.
“5시간을 넘기기 싫었다”는 유씨는 “42.195㎞를 달리는 내내 무엇을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달픈 삶을 살아온 그였지만 “이번 마라톤만큼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몸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뛰는 내내 눈앞에 떠오르는 숨진 애인과 할아버지,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는 유씨는 “이제 더욱 당당해질 수 있게 됐다”고 울며 웃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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