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선원(顯正禪院)을 찾았다.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과학도 출신의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20여년간 단 한 차례도 승진을 하지 않은 채 있다가 어느날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불법 공부에 매진했다는 이야기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동안 사진을 찍거나 인터뷰를 안했는데, 그게 겸손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글을 쓰고 책을 내기는 했지만,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기왕 정법(正法)을 펼치고자 책을 냈으니 널리 읽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인터뷰를 하기로 한 것이지요.”
첫 대답은 질문도 던지기 전에 나왔다. 좌탁 앞에 차분히 마주보고 앉은 그는 줄곧 너와 나를 나누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세간의 분별지(分別知)를 부수려 했다.
“진리라는 것은 말로 할 것도 없고 글로 표현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말과 글을 제쳐놓으면 대중하고 교감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어서 글로 쓰고 말을 하는 것이에요. 말할 게 없다는 것도 말이 없으면 전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그는 언어 외에는 다른 방편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불법을 펴는 곳은 간판만 선원이지 실제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참선을 행하지 않는다. 그가 참선이나 염불과 같은 ‘의도적’ 수행을 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가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핀잔을 듣기 일쑤다.
“범부는 하찮고 성인은 저 높은 곳에 있다고들 생각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 거룩한 성인처럼 되려면 좌선, 독경, 염불, 명상 등의 고된 수행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것은 다 쓸데없는 분별이에요. 범부나 성인이 다를 것이 없다는 것, 모든 이가 있는 그대로 바로 부처라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는 이를 ‘일승법(一乘法)’이라 했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이 있는 그대로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다. 다만 근기(根機)에 따라 설명을 달리할 뿐이다. 공무원 생활 20여 년만인 48세에 문득 깨달음을 얻고 일상인으로서의 삶을 접었다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그로서는 좌선과 독경 등 전통적 수행법을 고수하는 기존의 불교 교단 안에 머물 수가 없었다.
이 무렵 뜻이 맞는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1970∼80년대에 부산과 경남 산청에서 거사 중심의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쳐 상당한 호응을 받았던 백봉 김기추(白峯 金基秋·1908∼1985)거사와 인연이 닿기도 했다.
“백봉 선생과는 상당히 의기투합했었지요. 인간적으로도 좋아했어요. 함께 기성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법을 펼치려면 불교계 밖에서 펼쳐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지요. 하지만 그 분은 철야정진이나 참선 같은 방편을 사용했고 저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방향이 조금 달랐어요.”
그는 “수행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바로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런 입장이라면 별다른 수행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의 선원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방편은 현장에서 질문과 답변으로 진행되는 설법뿐이다.
대신 그의 설법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70세가 넘은 노인답지 않게 그의 언어는 매우 논리정연하고 불경은 물론 현대과학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선원에는 대학생 가정주부 직장인 승려 대학교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제가 본래 과학도였어요.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다’라든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와 같은 선사들의 말씀은 관찰 주체와 관찰 대상의 절대적인 구분, 존재와 비존재의 구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에요. 이런 것은 전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바로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과 통해요. 그냥 종교로만 이야기하면 다른 종교나 종파로부터 무시되거나 배척을 받지만, 과학을 이용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진리로 전할 수가 있지요.”
절대적 시공간 속의 객관적 대상을 부정하는 상대성이론이나 독립적인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양자역학이 불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에도 불교 이외에 이 같은 현대 과학 관련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의 법문 중 일부는 현정선원의 홈페이지(www.fuoyee.or.kr)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설법을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 돼요.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또 하나의 입장으로 삼고 그에 맞춰서 행동하려 하지요.”
그는 어떤 진리를 전해 주려 하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든 끊임없이 상대의 분별지를 부숴서 지금 있는 그 모습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임을 깨우쳐주려 했다. 기자는 실체 없는 자와 두 시간의 인터뷰를 하고 자리를 떴다.
김형찬 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