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허약한 정부 교활한 정치

  • 입력 2002년 3월 22일 18시 25분


가령 텃밭에 창궐하고 있는 가시덤불을 맨손으로 제거하고 새로운 작물을 심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뽑아내는 것이 가장 좋을까.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가시덤불 제거에 비유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는 “있는 힘을 다해 무자비하게 움켜잡고 신속하게 뽑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고통은 순간으로 끝나고 생산적 작물을 심을 자리가 빨리 정리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겁쟁이 정원사들은 뿌리를 뽑아낼 만큼 강하게 가시덤불을 잡을 용기가 없어 어정쩡하게 잡았다 놓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 고통은 영원한데 비생산적 가시덤불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다. 물론 새 작물을 심을 땅은 마련하지 못한 상태로 말이다.

▼불법파업에 어정쩡한 정부▼

개혁은 늘 기득권자의 반발을 전제로 실시되는 게임이건만 국가적으로 중요한 몇몇 개혁작업에서 정부는 기득권층의 집단적 반항과 현란한 혀놀림 앞에 형편없이 약해진 모습이다. 용감하게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많은 개혁은 손에 가시 박힐까 서성거린 정부의 소심증과 이익단체에 부화뇌동한 정치권의 탐욕 때문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공기업 파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번 사태의 진전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지도자의 용기와 정치인의 양식이 개혁에 얼마나 중요한 요인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정치권이 ‘무시무시한 노조’와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부의 법률안을 국회에서 잠재우는 통에 가스공사 민영화는 파업을 한 차례 거치고도 아직 표류중이다. 철도산업 민영화 역시 정치권이 노조 눈치를 보느라 이상한 정치논리를 대면서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비록 파업은 중단됐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 지금 철도산업이 국영으로 남아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어디 또 있는가.

한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발전노조의 파업은 더욱 가관이다. 이미 중앙노동위원회가 법적 구속력 있는 중재안을 결심해 노사단협이 끝났는데도 노조가 승복을 거부하고 파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얼마나 오래 전부터 예고됐던 파업인데 정부는 준비도 안된 채 허둥대기만 했고, 그렇다고 법대로 처리할 의지도 없을뿐더러 사태를 종식시킬 지혜도 없는 화상이다.

노조의 불법 파업 현장에 국회의원들이 찾아간 성의까지는 좋았지만 ‘민영화에 대한 국민의견을 재수렴하자’는 엉뚱한 중재안을 내놓아 스스로 국회의 꼴을 우습게 만들었다. 자신들 손으로 통과시킨 민영화법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개정을 말하는 것은 그 법을 국회가 졸속으로 통과시켰음을 자인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정치가라 불리는 영악하고 교활한 동물들의 잔재주’가 선거철을 앞두고 피어오르고 있단 말인가.

여당이 표를 의식해 개혁에 주저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정부가 일을 잘해야 표가 여당에 몰리게 되는데 여당이 이익단체 심사를 건드리지 않으려 개혁에 소극적이라면 더 큰 표를 갖고 있는 나머지 국민은 그런 정치인에게 결코 호감을 주지 않는다.

민영화에 맹목적으로 동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식의 불법 파업에 정부가 어정쩡한 자세로 스스로의 권위만 떨어뜨릴 일이었다면 민영화는 왜 시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뿐이다. 소심증 정원사에게 나라를 맡기고 있는 국민의 팔자소관인가. 정부 여당이 지난해 온갖 공권력을 동원해 비판적 언론을 압박할 때의 비장했던 결의와 용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지….

▼노조에 밀리고 정치에 차이고▼

정부가 일찌감치 개혁의 완수를 선언하고 이제부터는 상시개혁 체제로 간다고 한 것이 꼭 1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후 상시개혁의 현장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거되지 않은 가시덤불을 두고 물러서면서 ‘두고두고 치울 것’이라고 호언하는 정원사의 비겁한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발전노조의 불법 파업이 이토록 시간을 끌며 행정력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이 같은 정부의 약세가 읽혔기 때문은 혹 아닐까.

그런 가운데 오늘날 우리는 다시 정치의 계절을 맞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정치인들은 말로써 더 풍요한 밥상을 약속할 것이며 국민이 선택할 경우 그 밥값은 머지않아 재난처럼 고스란히 우리에게 떠안겨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혁은 더욱 어려워지고 지금 풀지 못한 숙제들은 또다시 가시덤불이 되어 우리의 정원을 휩쓸게 될 것이다. “경제만 좋아지면 됐지 뭘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정부가 노조에 밀리고 정치권에 차이면 터널 끝에 보이는 환한 빛이 언제 마주 달려오는 기관차의 불빛으로 변할지 누가 알 것인가.

이규민 논설위원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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