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문화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 '문화과학'

  • 입력 2002년 3월 29일 17시 23분


문화과학:인간과 문명의 연구/레슬리 화이트 지음 이문웅 옮김/604쪽 2만5000원 아카넷

문화가 경쟁력이라는 표어는 현재 한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학계에서도 문화 연구의 중요성과 필요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론이 없다. 문화는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의 대상이자 도구가 된 듯하다. 그러나 막상 문화가 무엇이고 또 어떤 방법론으로 문화를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각 분야에서 다양한 입장과 이론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런 학계의 현실에 비춰 볼 때, 현재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949년에 출판된 이래 무수한 논쟁을 겪어야 했던 이 책(1969년 제2판)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문화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다시금 고민할 기회를 갖게 됐다.

저자인 레슬리 화이트(1900∼1975)는 문화를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발견’한 인류학의 전통에서도 문화를 연구하는 방법론 측면에서 독특한 이론 체계를 구축한 학자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의 미국 인류학은 19세기의 진화론에 대한 비판 속에서, 문화 일반보다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의 개별 문화들(cultures)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풍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반 진화론적, 반 보편론적 학풍이 주도하던 시기에 화이트는 ‘문화 진화론’과 문화의 ‘보편적 과학성’을 주장하면서 저돌적으로 맞섰고, 그 결과 동료 학자들이나 교회, 국가에게서 배척받는 고난의 길을 가게 됐다.

화이트의 이론은 문화의 개념 규정과 이를 연구하는 문화 과학의 정립이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상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한 그릇의 물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성수(聖水)’를 만들 수 있는 존재다. 또한 성수와 같은 인간의 상징행위의 산물들이 문화를 구성하는 항목들이고, 이런 상징물은 인간 유기체와 관련짓지 않고도 설명될 수 있다. 이를 연구하는 것이 문화 과학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화이트는 문화의 과학적 연구를 문화학(Culturology)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한다. 문화학은 특수한 현상들을 설명하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고 서술하는 것으로서 ‘문화들’이 아닌 ‘문화 일반’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말한다. 즉, 문화는 상호작용 하면서 새로운 순열, 조합, 그리고 종합을 이루어 내기 때문에 이런 문화 과정은 개인이나 인간의 심리 같은 비 과학적 요소들을 배제한 문화 특질들간의 상호 작용만으로 연구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화이트는 동시대의 인류학자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화이트는 인간 혹은 개인을 문화 과정의 주체로 설명하고자 하는 관점을 인간 중심론적 편견이자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개인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문화 속에서 그 문화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문화의 발전은 수많은 문화특질들이 인간 유기체와는 상관없이 서로 상호작용 하면서 새로운 조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화이트는 인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천재나 위인들의 업적도 그들의 개인적 능력이나 창의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문화 특질들이 이룩한 상호 작용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무엇이 왜, 언제, 어디서 이루어 졌는가는 개인적 특질과는 상관없는 문화 과정으로 설명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이트는 그 예로 동시에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발견이나 발명이 일어난 많은 사례들을 제시한다. 즉, 위인이나 천재는 해당 시기의 문화과정이 이룩해 놓은 새로운 조합을 표현한 촉매자이거나 문화과정의 표현 수단일 뿐이라고 본다. 실제 화이트는 이집트의 문명사를 분석하면서 이집트 문화의 혁신을 가져온 이크나톤도 그가 뛰어난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기 이집트의 문화과정이 이크나톤을 통해 개혁을 낳게 했다고 설명한다.

근친상간 금기의 원인에 대한 화이트의 분석에서는 인간의 심리적 측면도 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적 분석에서 제거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된다. 근친상간 금기는 인간의 본능과 억압된 심리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프로이드류의 설명은 근친상간 금기의 보편성과 그 적용 범위의 다양성을 함께 설명해 내지 못하는 근거 없는 설명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화이트는 집단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가족간의 협동과 다른 집단과의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 사회 체계를 이루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결정체로 출현하게 된 것이 근친상간 금기의 관습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핵심은 인간의 본능이나 심리, 개인의 정신에 근거한 설명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화이트의 이론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철저한 문화 결정론으로 받아 들여진 데 있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20년 후에 나온 제2판의 서문에서 화이트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잘못 이해했거나 이해하기를 거부한 이유로 문화 결정론에 대한 적대감을 들었다. 자신이 주장한 문화 결정론은 방법론적인 것으로, 사회문화 현상과 문화 과정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이지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운명론이거나 패배주의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그의 생애 동안에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듯하다. 더욱이 현대 문화연구 이론에서 문화는 행위주체인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해석되며 복수의 문화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일견 화이트의 이론이 설 땅이 없어 보이지만,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화이트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책을 번역한 이문웅 교수(서울대 인류학과)는 1977년 화이트의 ‘문화의 개념’을 번역한 이래 국내 학계에 화이트의 이론을 소개해 왔다. ‘문화과학’을 번역하면서 역자가 첨가한 꼼꼼한 역주들과 역자 해제는 화이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국내 출판계의 번역 풍토에도 훌륭한 모범이 될 만하다.

한건수 강원대 교수 문화인류학 yoruba@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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