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折 腰(절요)

  • 입력 2002년 4월 2일 17시 33분


折 腰(절요)

折-꺾을 절 腰-허리 요 祚-자리 조 派-갈래 파 屈-굽힐 굴 糊-풀 호

唐(당·618-907)나라는 우리의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다.‘唐詩’(당시)란 말에서 보듯 詩가 무척 성행했는데 우리도 잘 아는 李太白(이태백)이나 杜甫(두보), 李商隱(이상은), 孟浩然(맹호연), 王維(왕유) 등 기라성 같은 詩人들은 모두 이 때 사람들이다.

淸(청)나라 때 全唐詩(전당시)라는 책을 편찬했는데 唐나라 2200 여명의 詩人에 4만 8000여 首의 詩를 모았다. 國祚(국조)가 300년이 채 안 되었던 王朝였음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숫자다. 그럼 문장은 어떠했는가? 본서가 나오고 얼마 뒤 이번에는 문장을 모은 全唐文(전당문)을 편찬했는데 3042명의 文人에 1만 8488편의 문장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많다’ 보니 여러 流派(유파)가 있었는데 시의 경우 田園詩派(전원시파)가 있다. 글자 그대로 田園에 묻혀 살면서 그 정취를 노래한 시인들을 일컫는 것으로 유명한 陶淵明(도연명·372-427)이 이 유파를 열었다.

때는 東晉시대, 천하가 어지러워 老莊(노장)으로 대표되는 道家思想(도가사상)이 성행했으므로 선비들은 草野(초야)에 묻혀 나오지 않았고 識者(식자)들은 時局(시국)을 한탄하며 술과 詩로 나날을 보냈다. 陶淵明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자연을 좋아하고 屈己從俗(굴기종속·스스로를 굽혀 세속에 따름)을 싫어하였으므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憤世疾俗(분세질속·세상에 울분을 느끼고 싫어함)했다. 하지만 食率(식솔)은 많아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친척이 말단 관직 하나를 알선해 주었다. 彭澤令(팽택령)으로 지금의 면장쯤 되는 자리였다. 봉급은 쌀 다섯 말. 그의 나이 마흔 하나였다.

糊口之策(호구지책)을 위해 잠시 天性을 굽혀 응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할 짓이 아니었다. 집무는커녕 매일 술이나 마시며 자연을 노래했다. 이런 따분한 생활이 계속 되던 중 하루는 공문이 날아들었다. 郡守(군수)가 순시를 나가니 官衙(관아)를 깨끗이 청소하고 衣冠(의관)을 단정히 하여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拘束(구속)을 싫어했던 그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吾不能爲五斗米折腰!’(오불능위오두미절요-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있으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부임한지 두 달 남짓의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자연을 벗삼으면서 田園생활의 즐거움을 읊은 것이 유명한 ‘歸去來辭(귀거래사)’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