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칼럼]北, 체제변화만이 살 길

  • 입력 2002년 4월 3일 18시 11분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대통령이 이제는 한반도에 전쟁위험은 없다고 국민 앞에 말했던 때가 언제 일인데, 지금 다시 그 대통령의 정부에서 위기를 거론하며 특사를 파견한다니 국민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도대체 이 정부의 안보기준이 무엇인가.

특사파견 발표도 마침 특검이 활동종결 보고를 하는 날로 잡아 대통령 친인척비리와 아태재단의 문제에 대한 관심의 강도를 희석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거나 월드컵 등 여러 가지 대사를 앞에 놓고 다시 햇볕정책을 가동시켜 국면전환을 꾀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핵 등 대가지불 요구 안통해▼

그동안 금강산 관광에 쏟아 부은 4억달러의 돈이 북에 들어가서 군사용으로 전용되었다는 사실을 미국은 한국정부에 비망록으로 전달했다는데도, 정부는 다시 금강산관광을 세금으로 지원하면서까지 계속하겠다니 도저히 그 정책의 합리성이 이해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행위가 개인에 의해 저질러졌다면 당연히 반역죄에 해당할 중대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외교권을 갖고 있는 정부가 하는 일이라서 백보를 양보한다 해도, 지금까지 해온 것은 돈으로 위장된 평화를 산 것에 불과하다. 무엇 때문에 이래야 하는가 하는 철부지 감상론을 제외하고 나면, 아무래도 대통령 개인의 무슨 이유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햇볕정책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현재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차원의 위험을 제외하고는 어떤 협력이나 교류든 간에 부차적인 의미 이상을 갖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 사정을 덮어놓은 채 긴장해소의 성과라고 하여 그간의 행적을 정부가 크게 선전하는 것은, 한반도의 전쟁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완전세대(完全世代)에게 엄청난 착각을 안겨주며 내적인 힘의 약화만 초래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우려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 요즘 일각에서 일고 있는 반미운동인 것이다. 정부가 그동안 햇볕정책이라는 유화정책을 취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군의 강력한 억지력을 배경으로 해서 가능했던 것인데, 이 억지력을 약화시키려는 북의 끈질긴 전략에 요사이는 정부조차 슬그머니 힘을 실어주는 듯한 인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북의 체면 봐주기를 미국에 간절히 요구해 온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남의 월드컵과 북의 아리랑축제를 이용해 이미 시간 벌기에 나선 북의 입장을 보강해주는 방향으로 정부가 나아갈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세계적 축제 속으로 한반도 문제를 끌어넣어 막다른 골목에 이른 북의 운명에 퇴로를 열어주는 전략을 구사하려 한다면, 이야말로 더 큰 불행을 키우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임을 국민들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부도 이제는 제대로 된 상황인식을 가져야 한다. 일본도 자국민의 피랍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과 수교는 불가함을 밝힌 바 있다. 특히 미국이 핵미사일과 통상병력문제뿐만 아니라 인권과 테러문제를 추가해 한 묶음으로 내놓고 과거와 같은 사안별 절충이 아닌 일괄타결 방식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 의지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정부는 핵과 미사일 문제를 다른 것과 분리시켜 접근하자는 의사인 듯한데, 이미 북한문제를 세계적 안보차원에서 규정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를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또 시간적으로 봐도 중국의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까지 북한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을 보지 않으면 안될 형편인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방향은 기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충분한 억지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스스로 이미 채택했어야 할 방향이었다.

▼정부도 햇볕정책 거품 빼야▼

이제 공은 북으로 넘어갔다. 대가 지불을 요구하는 방법이나 벼랑끝 전략도 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이상, 북도 세계의 제반 사정이 혁명적으로 변한 것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체제변화의 요구를 수용하기 바란다. 그것만이 민족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이다.

한편 한국정부도 더 이상 자아 도취적인 환상을 좇지 말고 정도(正道)로 나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만약 지금부터 섣불리 약은 꾀를 부리다가는 엄청난 난관을 자초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미 북한이라는 요소를 한국 내부정치의 구조적 요소로까지 끌어들여 자리잡게 한 현 정부는 그만큼 정치게임의 카드를 더 잡고 있다고 만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으로 정권 재창출을 꾀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국민 대다수가 갖고 있다는 여론조사결과를 보더라도, 허세로 불어나는 가계부채처럼 정부의 햇볕거품도 이제 거둘 때가 됐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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