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지키지 않는 자신을 탓하기보다 제도와 법의 문제점을 먼저 탓한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픈 심리에서 비롯된 투서와 모함, 비방 등이 판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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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법 탓?〓중소기업을 운영하는 H씨(44·경기 고양시 일산구)는 지난주 일요일 승용차를 몰고 경기 연천에 일을 보러 갔다. 전곡읍에서 3번 국도와 합류해 왕복 4차로 도로에 접어든 뒤 속도를 높였다.
제한속도 80㎞를 넘어섰다. 그때 맞은편 차로를 지나던 승용차가 전조등을 번쩍였다. ‘단속중’이란 것을 알려주는 표시였다. 그는 급히 감속했다.
조금 뒤 경찰 순찰차 2대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서울 번호판을 단 차가 ‘재수없게’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단속을 알려준 ‘착한’ 운전자에게 마음으로 감사했다.
H씨는 “도로 여건상 시속 100㎞도 충분하다”며 “경찰이 운전자 안전을 생각한다면 속도를 내려는 위치에서 경고를 해야지, 한참 달리고 있는 곳에 숨어서 단속하는 건 단속 건수를 채우려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속도제한 규정과 경찰의 함정 단속을 탓했다.
대부분의 운전자는 단속에 걸리면 ‘재수가 없어 걸렸다’고 생각한다. 법규를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은 칭찬받기는커녕 ‘답답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수년 전 상대방 과실로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가량 입원했던 주부 김모씨(40·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는 사고 이후 더욱 안전에 신경을 써 속도제한 규정을 철저히 지킨다.
최근 경기 파주시 문산에 가기 위해 자유로로 접어들었다.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향하는 길의 자동차 제한속도는 시속 90㎞였지만 이를 지키는 차량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보통 110∼120㎞, 심지어 140㎞ 정도로 내달리는 차도 있었다.
규정속도를 지키며 가던 김씨는 뒤따라오던 차들이 라이트를 번쩍이거나 경적을 울려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옆 차로로 비켰다. 지나는 운전자 가운데는 손가락질을 하거나 흘겨보는 이가 많았다.
승용차 1000만대 시대이지만 우리의 운전문화는 아직 후진국 수준이다.
차량 접촉사고가 나면 길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둔 채 상대 운전자의 잘못을 우기며 멱살잡이를 하거나 신호등이 청색으로 바뀌기 전에 노란색만 돼도 빨리 가라며 뒤에서 경적을 울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신을 반성하거나 법을 지키는 타인을 칭찬하기보다 남의 탓부터 먼저 하고 본다.
나만 생각해 도로 옆에 차를 세워둔 채 과일을 팔거나 상습 정체지역에서 음료수 등을 파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반독재투쟁을 했던 국회의원 출신의 한 인사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라지만 교통안전이나 납세의무라는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마땅히 단속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네탓’ 공방〓지난해 12월 초 떨어질 줄 모르는 국내 기름값의 조정을 둘러싸고 정부와 정유사, 주유소업계는 조정이 잘 안되는 것을 서로 상대방에 책임을 전가하는 공방을 벌였다.
또 같은 달 수지 김 피살사건 진상 은폐 의혹과 관련해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2000년 2월 경찰이 이 사건 내사를 중단한 이유를 놓고 서로 상대방에 그 탓을 돌리기에 바빴다.
정치권의 네 탓 공방은 일일이 그 예를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흔하다. 국회가 공전하거나 예산안 처리가 늦어질 경우 여야는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우선 상대 당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본다.
지난해 말 건강보험 재정 통합 유예기간을 놓고 벌인 협상이 결렬된 데 대해서도 여야는 서로 상대방에 책임을 떠넘기며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난무하는 비방과 음해〓정치인들 중에 자신의 말이 언론에 보도돼 물의를 빚을 경우 언론이나 타인에게 그 탓을 돌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 말이 와전됐다거나 곡해했다는 식이다.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난무하고 있는 비방과 음해는 허위 사실로 ‘네 탓’을 부추겨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는 대표적인 경우일 수 있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비방과 음해 등을 통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다 단속된 사례는 지난해 총 1509건으로 전년도에 비해 9.9배나 늘었다.
익명이라는 점을 악용한 이 같은 ‘정신적 폭력행위’는 특히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 고위공직자, 선거 입후보자 등을 겨냥해 이뤄진다.
모 군청의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의원 출마예정자를 겨냥해 “부인이 자궁암을 앓고 있는데도 속이고 암보험에 가입했다”는 내용의 거짓 글을 올린 사람이 검거된 사례도 있다.
인터넷의 속성상 순식간에 정보가 퍼지기 때문에 이런 허위사실이 유포되면 설령 사실무근임이 확인된다 해도 당사자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 단장인 하옥현(河沃炫) 경무관은 “인터넷 상의 비방과 음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은 윤리 의식과 도덕적 규범의 해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조헌주기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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