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짓는 집]'시간에 얽매인 삶' 무엇을 찾고있나

  • 입력 2002년 4월 12일 18시 52분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은 시계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의 삶에서 시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29세 되던 1759년 호남의 숨은 과학자 나경적을 만나는 장면에서다. 베이징 여행기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에 보면, 직접 자명종을 만들어 집에 감춰둔 이 칠십 노인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홍대용은 이 노인과 함께 자비를 들여 일종의 천문 시계인 혼천의까지 만들었다.

뉴욕 록펠러센터에 가면 이 혼천의와 비슷한 구체를 든 아틀라스 동상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이 동상을 보면서 자란 소녀가 바로 경도 계산의 역사와 해상시계 발전사를 추적한 ‘경도’의 작가 데이바 소벨이다. 지구의 세로축 방위를 가리키는 경도는 정밀한 시계의 개발 없이는 계산해내기 어려웠다. 곧 시계가 있어 무역과 침략의 역사가 본격화됐고 지구가 하나의 세계가 됐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출간된 히라카와 스케히로의 ‘마테오 리치’를 보면, 중국에 들어가는 리치의 손에 자명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간 뒤 베이징에는 동서남북 4개의 천주당이 생겼다고 한다. 그 중 조선인들이 잘 가던 남천주당에는 거대한 시계탑이 있었다.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 들른 홍대용은 이를 ‘자명종을 감춘 집’이라고 표현했다. 남천주당의 파이프오르간을 처음 보자마자 조선 음악을 연주했던 홍대용은 나중에 박지원에게 “나라에서 허락만 하면 그 악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아마 시계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들어온 시계는 우리 마음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루이스 멈포드는 ‘증기엔진이 아니라 시계가 현대 산업사회의 핵심 기계’라고 말했다. 효율과 의미만을 따지는 이 기계는 현대인은 모두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이 산업사회의 효율과 의미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일정으로 빼곡한 수첩은 앞으로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베트남 승려 틱낫한의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에는 설거지하는 방법이 나온다. “설거지를 할 때에는 설거지만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게 요점이지요.”

‘지금’을 잃어버린 사람은 설거지만 할 수 없다. 늘 다른 생각뿐이다. 200여 년 전, 홍대용은 ‘지금’의 흐름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시계에 매료됐다. 하지만 시계와 함께 태어난 우리는 그렇게 많았던 ‘지금’을 다 잃어버렸다. 천천히 열까지 숫자를 헤아려 보라. 당신의 삶은 그런 순간들로 이뤄져있다. 철저하게 관리된 일정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소설가 larvatus@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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