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가 묵는 호텔 객실에서는 한강의 푸른 흐름이 내려다보였다. 다음날 그가 뛰어 건널 잠실대교도 먼 발치에 보였다.
기자와 대면한 그는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3년 전, 연인을 암으로 떠나보낸 직후의 극한상황에서 만났던 그의 얼굴이 오히려 편해 보였었기에 다소 의아했다. 다음날 마라톤에서 완주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제 착수단계인 작품을 설명하는 일이 마음의 짐이 되었을까.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제가 소설가로 데뷔할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소재입니다. 먼 길을 돌아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이에요.”
유씨의 말처럼 ‘8월의 저편’은 그의 외조부인 마라토너 양임득(梁任得·1912∼1980)을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소설. 한국어와 일본어로 똑같이 발음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美里)’이라는 예쁜 이름을 유씨에게 지어준 사람도 외할아버지였다. 양씨는 일제강점기 손기정 옹을 잇는 유력한 마라톤 기대주였다. 1940년 도쿄올림픽을 목표로 맹훈련을 거듭했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올림픽이 무산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공산주의자이자 역시 달리기 선수였던 동생이 교정에서 총격을 받고 실종된 뒤 외할아버지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동생의 시신을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 훌쩍 일본으로 건너가셨죠. 만년에 훌쩍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곧 타계하셨습니다. 어떻게 일본행까지 결심했고 연고도 없이 정착에 성공했고, 왜 다시 한국으로 오셨을까요. 의문투성이입니다. 처음엔 이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외조부 이야기를 쓴다는 생각은 당분간 접어두어야 했다. 일본 현대사회를 소재로 한 ‘가족 시네마’ 등 초기작이 연속해서 성공을 거두면서 친숙한 소재로 작가로서의 위상을 세우는 작업에 주력해야 했기 때문.
1999년 아사히신문이 그에게 장편소설 연재 제의를 했을 때 ‘이제는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OK 회신을 보내면서 ‘아사히와 협력관계에 있는 동아일보와 동시에 연재하자’는 제의도 유씨가 했다. ‘한국 일본 재일한국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할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번역 과정도 거치는 만큼, 아사히신문에 먼저 싣고 며칠 뒤에 동아일보에 실리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다는 의견도 있었지요. 그러나 한국과 일본에서 실시간으로 동시에 읽게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두 나라에서 동시에 반응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네 차례나 한국을 찾아 서울과 경남 밀양 등지에서 외할아버지의 지인을 수소문하는 등 치밀한 ‘취재’를 펼쳤다. 근대사를 주제로 한 TV드라마 녹화테이프를 100여시간 분량이나 입수해 샅샅이 살피며 복식 풍습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모두 다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차갑고 쌀쌀맞은 분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던가 하면,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이웃에 대한 배려가 많은 분이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한 인간을 그렇게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랍기까지 했어요.”
충격적이거나 비상하게 인상적인 얘기를 접한 것도 있지만, 연재에 앞서 섣불리 밝히지는 않겠다고 그는 말했다.
“한 가지만 얘기한다면, 좌익운동을 하던 외할아버지의 동생이 실종되던 날의 일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의 기억이 일치했습니다. 학교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학교 뒤편의 저수지로 도망쳤던 그는 결국 붙잡힌 뒤 실종되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동생의 행방을 찾았지만 결국 알 수 없었습니다. 전쟁 1년전의 일이었죠.”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닥치기도 했다. “전통적인 한국의 무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혼을 불러내어 뛰게 하는 장면을 그려야 했지요. 그런데 도움을 줄 만한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굿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자기의 유명세에 너무 집착하는 분이 이벤트를 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밀양에 있는 사람의 소개로 진짜 영험하다는 분을 찾았습니다만 ‘유미리의 굿을 하면 좋지 않다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죠. 만나주기로 약속한 분이 다음번 방한 때는 저세상 사람이 된 경우도 있었어요.”
유씨는 ‘무당과 관련된 곡절로 말하자면 진짜로 귀신이 작용하는 것 같다’며 굳어진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마라톤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장편소설 연재도 결국 마라톤 아닌가.
“오늘 아침 호텔 뒷길서 뛰다 길을 잃었습니다. 지리를 모르니까요. 이 소설 역시 마지막에는 길을 잃을 것입니다.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 추락하는 일입니다. 정신적으로 극단의 위험을 포함하는 작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문득 3년 전의 인터뷰 때 ‘소설 쓰는 한 행복한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한 그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불행이 아이에게 전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골몰한다며 결연한 표정을 짓던 모습도 떠올랐다. 유씨의 아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저널리스트를 아버지로 2000년 태어났다. 기자가 언급하지 않아도 얘기는 자연히 아이에 대한 부분으로 흘러갔다.
“올해 초 아들과 아이의 외할아버지(유씨의 아버지)를 만나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집의 남자아이들은 남자들을 싫어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아이가 외할아버지 다리에 매달리면서 ‘할아버지…’하고 부르는 거예요. 그 장면을 보고 핏줄의 진함을 느꼈습니다.”
‘핏줄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정말로 이상해’라는 듯한 골똘한 표정을 나타냈다.
“경마를 할 때도 마권에 혈통이 쓰여져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일본의 경마팬들은 비오는 날에는 대대로 비오는 날 잘 달리던 혈통의 말 후예에 걸어보곤 합니다. 피를 사듯 마권을 사는 거죠. 내일은 마라토너 외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유미리가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싶습니다.”
약속한 한시간이 지났다. ‘자아, 그러면’이라고 말하다 문득 생각난 듯 그는 인상적인 한마디를 보탰다.
“이 이야기는 ‘귀향할 수 있는 곳이 없는 귀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지만 집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입니다.”
문득 지난번 인터뷰때 그가 시종 담배를 손에서 떼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담배를 끊은 것일까.
“아아…(웃음) 그때는 갓난아이를 친구집에 맡겨놓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데려오면서 저절로 담배는 피우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유미리가 ‘사투’ 끝에 동아마라톤을 4시간54분22초의 기록으로 완주해 내는 것을 보고 역시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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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맡은 김난주씨/"원작의 맛 그대로 느끼게 할터"
“유미리씨는 번역자에게 ‘고통’을 주는 작가입니다.”
‘8월의 저편’ 번역작업을 맡은 전문번역가 김난주씨(43·사진)의 말. 그는 ‘가족시네마’ ‘타일’ ‘골드러시’ ‘루주’ 등 유미리의 작품 대부분을 한국어로 번역해 국내 유미리 팬들에게는 친숙한 존재다. 특히 유씨의 소설은 ‘풀하우스’를 제외하고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국내에 소개된 셈.
그런데 왜 고통을 안겨주는걸까.
“내용과 문체 양쪽에서 그렇죠. 유씨의 문체는 극도로 파워풀하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정돈하고 머리로 써나가는 게 아니라 나오는 대로 표출하는 방식이니 번역하기는 더욱 힘들죠. 내용으로 들어가면, 이런 내용을 표현하느라고 얼마나 고뇌했을까라는 공감을 주면서도 때로 극단적이어서 혐오감까지 갖게 되는 때가 있어요.”
물론 번역자가 갖는 그러한 ‘고통’과 ‘혐오감’은 작가의 미덕으로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유씨만큼 사회적 상황에 대해 기민한 작가는 없습니다. 청소년 문제 등 문제가 되는 이슈에 누구보다 빨리 ‘대드는’ 작가로서의 민첩성에는 언제나 경탄하게 되죠.”
이번에 연재하
는 우리말 제목 ‘8월의 저편’도 유씨의 손을 거쳤다. 원제인 ‘8月の果て’를 직역하면 ‘8월의 끝’. 그러나 ‘끝’을 뜻하는 ‘果て’에는 완전히 끝나지 않는 ‘여운’이 들어있어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유씨와 상의 끝에 ‘8월의 저편’이라는 제목을 택했다.
“원작보다 나은 번역이란 없습니다. 한없이 원작에 다가가는 것일 뿐이죠. 원래의 텍스트에 가장 맞는 언어를 선별하는 꼼꼼한 선별사의 작업이 번역자의 역할입니다. 작품 연재가 끝날 때 까지 이 준엄한 명령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합니다.”
남편 양억관씨와 함께 부부번역가로 활동중인 김씨는 가톨릭대에서 번역이론과 번역연습 과목을 강의하며 ‘재택근무’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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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그릴 이즈쓰씨/"한일 동시연재 부담-기쁨 두배"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서는 가슴이 뛰기도 합니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이 공동게재하는 유미리(柳美里)씨의 연재소설 ‘8월의 저편’에 삽화를 그릴 이즈쓰 히로유키(井筒啓之·47·사진)씨는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는 삽화가라면 모두 동경하는 일”이라면서도 “일본과 한국의 대표적 신문에 동시에 게재된다는 점에서 두배의 부담감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 자신감도 표시했다. 지난해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 때문이다. 그는 “외국이라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으며 감각적으로 쉽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느낌으로 삽화를 그리면 한국의 독자들도 이해해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기대다. 유씨처럼 그도 100여편의 한국영화 비디오를 사와 열심히 한국을 공부하고 있다.
소설의 한국어 제자(題字)도 그가 쓴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반년 동안이나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기도 했다.
이즈쓰씨는 94년 ‘주간 아사히’가 연재한 유씨의 에세이 ‘가족의 표본’에 삽화를 그린 적이 있어 유씨와는 두 번째 만남이다. 그는 “그때는 내 능력 이상의 삽화를 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유씨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자신의 평범한 인생이 만나 좋은 작품을 낳게 해준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즈쓰씨는 86년부터 삽화를 그리기 시작해 그동안 일본의 유명 주간지와 월간 소설잡지,기업광고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98년에는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철도원’의 단행본 표지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세련과 야만, 액션과 정지가 공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8년에는 고단샤(講談社)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도쿄〓심규선 특파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