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김호득(52·영남대교수)하면 우선 술이 떠오른다. 김호득은 그만큼 술을 좋아하는 화가다. 술을 마시고 취흥(醉興)에 빠져 격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시원스레 쏟아져내리는 폭포의 물줄기를 즐겨 그렸다. 술에 힘입어 일필휘지로 붓을 휘두른 것이다. 적당한 취기에 적당한 흐트러짐, 거기서 발산하는 자유분방함과 자신감 그리고 기(氣). 김호득에게 술은 그림이었고 몰아의 경지였다. 조선시대 화가 김명국(17세기)이나 최북 김홍도(18세기) 장승업(19세기)처럼.
그런 김호득이 술을 끊었다. 1996년의 일이다. 간과 폐가 크게 상해 한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창작 에너지의 원천이었던 술이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버릴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는 결국 술을 끊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1997년부터 다시 붓을 잡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김호득이 술을 끊은 것은 미술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작품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술이 사라지니 폭포는 온데 간데 없고 그의 호방함마저 사라졌다.
김호득의 그림은 그렇게 변해갔다.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단주(斷酒) 이후, 그 변모를 엿볼 수 있는 김호득의 개인전이 열린다. 5월19일까지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흔들림, 문득’. 1997년 이후의 근작 수묵화 40여점을 전시한다.
술의 힘을 빌어 그린 그림과 술을 끊고 난 뒤의 그림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우선 신중하고 침착해졌다. 일필휘지가 아니라 하나하나 점을 찍거나 섬세하게 선을 그려나가는 수묵화로 변해갔다. 연속으로 이어진 점은 파도의 일렁임같다. 그 일렁임은 결코 격정적이지 않다. 차분하고 섬세한 떨림이다. 김호득은 또한 거대한 점 하나로 한지를 가득 메우기도 한다. 동양 수묵화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이를 놓고 작가는 “전에는 생명력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명 그 자체를 그린다”고 말한다. 생명 그 자체는 살아있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일 수도 있지만 조금만 달리보면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마음의 흔들림을 따라 문득 점 같기도 하고, 문득 선 같기도 한 것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흔들림, 문득’이다. 생명은 꼭 구체적 대상일 필요가 없다. 폭포와 계곡 등 구체적 대상을 묘사한 과거와 달리 단주 이후에 그림이 단순해지면서 추상화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술의 힘을 빌지 않고 이제 맨정신으로 삶과 미술에 맞서는 김호득. 그러나 단주 이후 김호득의 그림을 완성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미술에 대한 그의 사유는 깊어졌지만 세련미나 완성도면에선 뭔가 좀 아쉽다. 하지만 지금 김호득의 미술은 자신의 미술 인생에 있어 중요한 변화의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변화를 미술계가 궁금해하고 있다. 이번 전시 ‘흔들림, 문득’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02-2020-2062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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