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우리네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사랑방에 곁달린 쇠죽솥에는 겻섬(겨를 담아놓은 바가지)에서 퍼 온 겻가루와 콩깍지가 섞인 여물을 넣고, 반지르르 기름기 도는 부엌 가마솥에는 통감자 몇 알 넣어 쌀보리를 안친 뒤에 불을 지폈다.… 이글이글한 화롯불에는 지글지글 된장찌개를 끓여 내고, 식구수대로 밥까지 뚝딱 퍼 놓고서야 어머니의 아침 부엌데기 노릇은 얼추 끝이 났다.’
사라지는 것은 그리움을 낳는다. 시대는 변했고 사라져 가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고 버리고 떠나 보내야 했다. 혹여 우리는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버리며 살아 온 것은 아닐는 지.
이 책은 ‘그리움’이라는 추상을 이 땅의 풍경으로 형상화한 책이다. 잊혀져 가는 사람들과 사라져 가는 문화가 220컷 삶의 풍경속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 때를 아십니까’류의 추억여행이 아니라 엄연히 지금 이 시대 현장에서 엄연히 살아 숨쉬는 것들이기에 더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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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이 부지기수라지만 한겨울이 되면 아직도 얼음배(깨진 얼음을 배로 삼아 타는 것)를 타고 노는 아이들이 있다. 강원도 산간마을에는 억새로 엮은 도롱이(우비의 일종)를 입고 옹기로 만든 똥장군을 지고 가는 할아버지가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짚으로 덮어 1년이고 2년이고 들판에 방치하는 풍장(風葬)을 최고의 장례로 치는 마을(전남 신안 도초면 고란리)도 있다.
책에는 지난 6년여 동안 이 땅 구석 구석을 찾아 다니며 사라지고 있는 것들의 기록을 위해 흘린 저자들의 땀이 곳곳에 배어 있다. 파릇파릇 새싹 돋으면 봄나물 캐러 줄레줄레 나서는 아낙네, 짙푸른 바다와 어울려 파도처럼 일렁이는 바닷가 보리밭에서 봄보리 베는 노인, 마을 뒷산 닮은 초가지붕, 서리내리는 겨울날 잘 이겨내라고 김치 위에 정성스레 덮어 두던 김치 움막, 들숨날숨 내쉬며 건강하게 살아있는 질박한 흙 살림집, 초가집 앞마당 가로질러 찰방찰방 ‘물지게’ 지고 가는 할머니.…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겐 아련한 추억을, 도시에서만 자란 사람들에겐 심지어 이국풍경같은 신선함을 준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민속학 보고서와도 같은 이 책을 보면서 기자는 나를 낳은 부모와 그리고 그들의 부모, 또 그들의 부모가 호흡했던 일상을 손에 만지듯 느꼈다. 그들의 일상은 빠름이 아닌 느림이었으며 단절이 아닌 공존이었고 투쟁이 아닌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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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식구나 다름없는 소가 흙탕을 철벅이며 앞장서면 농부는 뒤에서 봇줄을 잡고 써레에 올랐다. 이 더디고 신산(辛酸)한 풍경들. 아직도 이 땅에는 써레질을 하듯 느릿느릿 자신의 삶을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빠르게 사는만큼 빨리 가고, 느리게 사는 만큼 더디 가는게 아닐까.’
‘초가집은 사람사는 집만이 아니었다. 굴뚝새도 살고, 지킴이 새도 살고, 굼벵이도 살고, 너도 살고 나도 살았다. 너 죽고 나살자 혹은 너 죽고 나죽자는 요즘의 주거문화와는 질이 달랐다. 자연과 인간과 생활이 공존공생해 온 문화, 그것이 바로 초가문화였다.’
‘개똥 애비가 요즘 남자구실을 못 한다더라, 말순네 할머니가 노망이 들어 똥 묻은 손으로 만두를 빚더라, 만수 청년이 엊그제 아랫말 순덕이와 뽕나무밭으로 들어 갔다더라 등등, 온갖 소문이 모여들고 흩어지는 오늘날의 뉴스센터, 빨래터. 신세한탄과 위로와 소문을 주고 받으며 아낙들은 빨래터에서 정을 나누고 오해를 푸는 마음의 품앗이를 나눴던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은 예고가 없다. 이번 주말에는 잠시, 생활의 속도를 줄이고 우리 주변에 사라져 가는 것들에 눈길을 돌려보자. 가야 한다면 보내야 겠지만, 가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혹 보내지는 않았을까. 그 옛날 사랑처럼 말이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