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송광사와 지눌

  • 입력 2002년 5월 5일 17시 56분


“이 지팡이가 말라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내가 어디선가 다시 태어나 수행하고 있는 줄 알거라.”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1158∼1210)은 지팡이 하나를 전남 순천 송광사에 꽂아 놓고는 세상을 떠났단다.

“이 나무는 언제부터 말랐죠?”

“글쎄요,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동자승 같이 해맑은 얼굴에 걷기보다는 좌선에 더 익숙해 보이는 다리로 ‘허적허적’ 춤추듯 발걸음을 옮기던 정일(正一)스님이 빙그레 웃었다.

보조국사 지눌 영정

사람 키의 서너 배는 됨 직하게 자라서는 볼품 없이 말라비틀어진 송광사 초입의 이 ‘지팡이나무’부터 뒤편 언덕에서 절을 내려다보고 있는 부도(浮屠·사리탑)까지, 지눌의 후광은 장대한 사찰 전체를 감싸고 있다.

1197년 지눌이 이곳에 자신이 구상했던 종교공동체를 건설하기 시작한 후 이 절에서는 고려말까지 국사(國師)만 16명이 배출됐고, 훌륭한 승려들을 많이 길러낸 이 송광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승보(僧寶)사찰이 됐다.

“멀고 먼 윤회의 길은 외로운 혼이 홀로 가는 것이니, 비록 보배와 재물이 있다 해도 하나도 가져갈 수 없으며 잘난 가문이 있다 해도 끝내 한 사람도 따라와 구제해 주지 못한다. … 그때가 됐을 때 무슨 안목(眼目)이 있어 고해(苦海)를 건너는 다리 역할을 하겠는가? 인위적인 공덕을 조금 쌓아놓았다 하여 이 환난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1190년 지눌은 한국불교사의 한 획을 긋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선과 교를 함께 수행하는 모임에 참여하기를 권하는 글)’을 지어 전국방방곡곡에 돌렸다. 재물과 권세에 연연하며 깨달음과 중생구제라는 불교 본래의 목적을 잃고 타락해 가던 당시 고려의 불교계를 질타하고 새로운 수행공동체 건설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스물 네 살(1182)에 담선법회(談禪法會)에서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뜻 맞는 이들과 모임을 결성하고 항상 정(禪·선정)과 혜(慧·교학)에 힘쓰도록 하자”고 주장했던 지눌. 그 후 승려로서 보장된 출세의 길을 버리고 개경을 떠나 전남 담양 청원사(淸源寺), 경북 예천 보문사(普門寺) 등지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그가 경북 팔공산 자락의 거조사(居祖寺)에서 드디어 정혜결사(定慧結社)에 참여하라는 초대장을 띄운 것이었다.

“선종과 교종, 유가와 도가를 막론하고 높은 뜻을 가지고 티끌 같은 세상을 벗어나 고고하게 세상 밖에 노닐면서 오로지 내적 수행의 길에 정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비록 옛날 함께 약속했던 인연이 없을지라도 이 결사문 뒤에 서명할 것을 허락하노라.”

이 결사에 뜻을 같이한다면 선종도 교종도, 유가도 도가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수행방법에서도 참선과 교학을 병행하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자신이 곧 부처임을 믿고 이해하는 것에 의지해 돈오(頓悟)의 길로 들어가는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화두를 잡고 선을 수행하여 직접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 등 세 가지 길을 제시했다. 이것은 여말선초부터 우리 불교계의 큰 골칫거리였던 선과 교의 대립을 아우르는 사상이자 수행론이었다. 이밖에도 계율을 중시하고 염불을 허용하는 등 불교수행의 다양한 방편을 이용해 수행자들의 수준과 성향에 맞는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송광사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지눌의 사리탑인 감로탑(甘露塔)

송광사는 지눌이 본격적으로 수행공동체의 장을 마련하고자 물색해서 찾은 곳이었다. 지금도 송광사의 선방인 ‘수선사(修禪社)’에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선정(禪定)과 교학(敎學)을 아우르는 정혜문(定慧門)이다.

“들어가겠다는 스님들의 신청을 받아서 심사한 후에 들여보내지요. 저 문에 한 번 들어가면 적어도 석 달은 있어야 돼요.”

새소리 바람소리와 ‘침묵’으로 가득한 수선사는 그것도 모자라 담쟁이덩쿨과 긴 세월의 흔적이 꼭꼭 감싸고 있다.

그 곳에서 선과 교를 함께 수행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깨달음 뒤의 끊임없는 수행을 주장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지눌 이래의 전통적 사상이자 수행법이다. 지눌의 이 사상은 뒷날 ‘돈오돈수(頓悟頓修)’론과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당시 세속에 물들고 선과 교로 나뉘어 쟁론을 벌이는 불교계의 상황에서 순수한 수행으로 돌아가자는 지눌의 제안은 신선했다. 특히, 그의 포용력 있는 수행론은 많은 수행자들을 포용해 그들을 정진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다. 절 한켠의 ‘부도밭’에는 이 절에서 배출된 큰스님들의 사리탑 수십 개가 모여 승보사찰의 역사를 보여준다.

본래 이 절이 자리한 산의 이름은 송광산(松廣山), 절 이름은 길상사(吉祥寺)였다. 지눌이 이곳으로 옮겨오자 왕이 조계산(曹溪山)과 수선사(修禪社·‘선을 수행하는 집단’이란 의미이므로 ‘寺’가 아니라 ‘社’다)라는 이름을 내려줬고, 언제부턴가 ‘송광사’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조계종은 지눌 이전부터 있던 고려의 거대 종파였지만, 지눌의 영향이 커지면서 언제부터인지 지눌을 현재 조계종의 종조(宗祖)라 여기는 데 별다른 이론이 없게 됐다.

지눌의 정신을 이어 한국불교의 동량(棟梁)을 키워내고 있는 곳이 송광사라면 한국 최대의 불교종단인 조계종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곳은 아무래도 서울에 자리잡은 조계사다.

이 조계종의 ‘본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민족종교로 급성장했다가 쇠락한 전북 정읍의 보천교 십일전의 자재를 인수해 지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건축양식을 짐작하기 어려운 현대식건물들 사이에 싸여 있다. 어쩌면 가장 ‘절답지 않은 절’의 모습으로 서울 한복판에 서 있는 셈이다.

명산대찰을 해치는 산림개발을 중단하라는 조계종 원로회의의 게시문, 대웅전 보수를 준비하는 인부들의 분주함, 대웅전 앞의 고목을 돌며 탑돌이를 대신하는 신자들, 대웅전 앞에서 졸고 있는 노숙자, ‘2002 월드컵 성공기원 대법회’를 알리는 현수막까지. 산사가 아닌 도시의 절에 익숙치 않기 때문인지, 이 시대를 반영한 사찰의 다문화적 생동감보다는 오래도록 법난에 시달려 온 조계종의 지난한 역사를 생각하며 떠나온 송광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송광사 뒤편 언덕 위의 보조국사 사리탑 앞에서 철쭉을 입에 물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한 스님을 보고 정일스님이 말을 걸었었다.

“저 산의 노을이 참 일품이지요.”

“이곳에 오면 마음이 참 편해요.”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 뒷 이야기

‘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2):경주 분황사-황룡사터와 원효’(4월29일자 A19면) 기사가 나간 후 황룡사 터와 분황사 사이의 당간지주는 황룡사의 당간지주가 아니라 분황사의 당간지주라고 주장하는 한 독자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분황사의 종무소에서는 황룡사 당간지주라고 안내해 줬으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이 지역 발굴담당자에게 확인한 결과 절의 위치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창건 약 1세기 후인 8세기에 만들어져 분황사의 당간지주로 사용돼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다만, 아직 공식적인 발굴 보고서는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 지눌 '돈오점수'…성철 '돈오돈수' 논쟁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논쟁은 1980년대 초에 당시 조계종 종정으로 종단 안팎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성철(性澈) 스님이 돈오돈수의 입장에서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본격화됐다.

돈오점수는 문득 깨달은 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고, 돈오돈수는 한 번의 깨달음으로 수행이 완성된다는 것.

성철 스님은 1960년대부터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해 왔지만, 이 무렵 그의 저서인 ‘선문정로(禪門正路)’ 서문에서 지눌의 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모두 지해종도(知解宗徒·깨달음을 체득이 아닌 지혜로 이해하는 무리)라고 비난하며 선문(禪門)에서 이들의 폐해가 커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책을 저술했다고 한 것이다.

종정이 이 종단의 종조(宗祖)로 받들어져 온 지눌의 핵심사상을 비판했으니 파문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논쟁은 국내외 불교계와 관련 학계로 번졌고, 1990년 송광사에서 보조사상연구원이 주최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주제의 대규모 국제학술회의에서 이 문제를 집중 논의한 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논란의 쟁점은 일단 깨달은 후에 수행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지눌의 ‘돈오점수’에서 ‘돈오’가 성철 스님의 지적처럼 깨달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의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스승도 없이 외로운 수행과 여러 경전의 도움으로 수 차례의 전환기를 거치며 정혜결사를 완성했던 지눌과 전설적인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성철 스님의 수행과정이 달랐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후학들에게 제시하는 수행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 옳은가는 지금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지눌은 돈오점수를 방편으로 한 수행공동체 정혜결사를 창설해 당시 불교계의 세속적 타락을 막고 선과 교의 대립을 극복했다. 한편 성철은 돈오점수를 비판함으로써 수행도 제대로 안 한 채 고승대덕(高僧大德)인 양하며 종단을 전반적으로 타락시키는 많은 승려들에게 근본적 반성을 촉구했고, 이 논쟁을 통해서 불교계는 진정한 ‘깨달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됐다.이미 지눌을 논하지 않고는 한국불교를 논할 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그것이 진정으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위한 것이라면 지눌은 자신이 어떤 방편으로 사용되든 크게 누가 된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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