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 없더라도 기업 총수나 오너 가문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가신(家臣)형 임원’들이 계열사를 돌아가며 사장을 두루 지내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대기업은 물론 인사시스템이 보수적이었던 은행에서도 경쟁력 있는 CEO라면 조직 안팎, 나이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는 추세다.
국내에서도 기업과 헤드헌팅업체 사이에 CEO 채용을 의뢰하고 소개하는 ‘CEO 마켓’이 급속히 커져가고 있다.
국제시장에서 내로라 하는 헤드헌팅업체도 속속 한국에 ‘상륙’했다. 콘페리 인터내셔널과 하이드릭 & 스트러글스에 이어 이곤 젠더도 지난달 개업해 이 분야 ‘3강(强)’이 모두 한국에서 각축을 벌이게 됐다. 이에 맞춰 국내 업체들도 인력 보강에 나서는 등 내부정비에 한창이다.
▽외국계 및 정보기술(IT)기업 위주에서 대기업, 금융권으로도 확대〓그동안 국내 헤드헌팅업체의 단골 고객은 회사이름 맨 뒤에 ‘코리아’가 붙는 외국계 기업들. 국내 인맥에 약하고 외국의 채용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기업들 외에 국내 기업의 발길은 드물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후 사정이 달라졌다.
두산은 98년 이후 3명의 사장을 헤드헌팅사를 통해 채용했다.
샤니 사장을 지낸 한승희(韓勝熙) 의류BG(사업단위) 사장, 제일제당 부사장을 지낸 박성흠(朴星欽) 식품BG 사장, 질레트싱가포르 사장을 지낸 전풍(田豊) 오리콤 사장 등이다. 이들이 현재 맡고 있는 분야는 모두 가장 좋은 실적을 내고 있어 박용오(朴容旿) 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드헌팅의 업무특성상 ‘공개’를 꺼리지만 최근 국내외 헤드헌팅사들은 제일은행, 국민은행, 서울은행 등 은행장 선임에도 참여해 대상자들을 검증하고 추천했다. 실제로 헤드헌팅사 추천에 의해 은행장이 선임된 경우도 있었다는 후문.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서치 유순신 사장은 “CEO급만 1년에 50여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물론 정부투자기관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최근 헤드헌팅업에 뛰어든 인커리어의 박운영 이사는 “외국계 기업은 물론이고 국내 대기업에서도 요즘 신문에 등장하는 CEO급 신임 인사의 최소한 절반은 헤드헌팅을 통해 뽑았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추정이다”고 설명했다.
하이드릭 & 스트러글스의 최정수 부사장은 “최근 CEO 채용을 의뢰하는 기업고객이 외국계 기업, 합작기업, 국내 기업이 각각 3분의 1씩”이라며 “외환위기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커다란 변화”라고 말했다.
▽왜 헤드헌팅사를 통하는가〓회사 안에서도 CEO 자리만 바라보고 청춘을 바쳐 뛰어온 임원이 수두룩한데 기업들은 왜 굳이 외부에서 찾을까? 대답은 ‘변화와 경쟁력’으로 압축된다.
98년 4월 한국사무소를 연 콘페리 인터내셔널의 이성훈 부사장은 “대주주들이 최단기간에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회사를 개혁하기 위해 외부에서 CEO를 찾는 경우가 많다”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줄을 따질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실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경영인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적합한 인력을 뽑을 수 있다는 점도 헤드헌팅을 통해 CEO를 채용하려는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기업들이 선호하는 CEO형은〓CEO 마켓이 커지면서 자신을 이 시장에 내놓는 ‘역(逆)헤드헌팅’도 크게 늘고 있다.
KK컨설팅의 김국길 사장은 “기회가 나면 자신을 다른 기업의 사장급 임원으로 소개해 달라며 보내오는 전현직 임원들의 이력서가 1년에 500∼600건이나 된다”며 “사장급은 2∼3개월 이상 철저한 검증을 거친 다음 추천한다”고 설명했다.
헤드헌팅업계가 전하는 ‘대기업이 선호하는 CEO형’은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개혁추진형’. 연령층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 압도적으로 많고, 50대 중반을 넘어가면 인기가 뚝 떨어진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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