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의 군사 쿠데타는 낯선 땅에 들어와 채 피지도 못한 민주주의의 봉오리를 꺾었으며, 20년 뒤의 5·18 광주에서는 다시 피려던 민주주의의 꿈이 신음 속에 잠겨버렸다.
이제 2002년,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면서 밝은 햇살과 시원한 단비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꽃은 활짝 필 것인가.
▼5·16 5·18 질곡의 현대사▼
1961년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했던 근본적인 까닭은 무능하고 부패했던 민간 정부들을 국민이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전횡과 장면의 무능에 식상한 국민은 군대가 들이대는 총칼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통치가 18년이나 지속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아마 알았다면 그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았으리라.
그 18년 동안 대한민국은 무척 많이 변했다. 그 변화의 크기는 개화기에서 일제 통치에 이르는 사회적 격변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희가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선도한 것은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만큼 그는 한국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국민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아무리 길어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추진한 경제성장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쳤다. 중산층과 지식계층을 비롯한 민간 부문의 성장이 군부-권위주의 세력의 힘에 필적하게 되었고, 이들이 품었던 민주주의의 염원을 더 이상 힘으로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박정희의 비극은 스스로 잉태한 것이었다. 그의 최후는 변화한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체제가 너무나 굳어버렸기 때문에 왔다.
그러나 아직 남은 군부의 힘이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였고, 민간세력은 이를 당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광주의 참극과 전두환 정권의 탄생이었다. 전 정권은 군사정권의 시대적 조건이 다한 참에 나타난 잉여물이었다.
물론 전 정권의 치적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자기 자리가 없는 역사의 터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불명예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노태우 정부도 그런 점에서는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다. 노태우 정부의 성격은 군부-권위주의에서 민간 민주 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이었고, 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도기는 쓸데없이 길었다. 그것은 민간 민주세력들의 분열 때문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이른바 양 김씨는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야당을 지도한 민주 투사였지만, 민주주의 부활의 기회에서 분열하였다. 나중에 정권을 장악하자, 그들은 정치적으로 서투르고 개혁 능력이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권위주의에 대항해 싸우는 훈련은 많이 하였으나 진정한 민주정치의 연습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양 김씨는 군사 정권의 잔재를 없애고 정치제도를 민주화하며 정경유착을 줄이는 등 정치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진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또 다른 해악을 낳고 말았다. 그것은 지역에 기반한 패거리 정치다. 군부 독재가 끝나고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정착되자 지역 정치, 우두머리 정치, 패거리 정치가 고개를 든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선을 새정치 출발점으로▼
한국 정치 발전의 목표는 과거에는 독재 타도였으나 이제는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양 김(아니 3김) 정치 타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역 패거리의 부패 정치를 청산하고 ‘깨끗한 정치, 분권화의 정치,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의 틀을 닦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 2002년의 대통령 선거다.
이것은 5·16, 5·18로 상징되는 5월의 비극을 끝장내고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할 중대한 선거가 될 것이다. 국민은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누가 과연 3김식 구태 정치를 청산하고 새롭고 참신하면서도 진정한 민주 정치를 엮어낼 것인가. ‘귀족’의 이회창인가, ‘불안’의 노무현인가. ‘보수적 개혁’인가, 아니면 ‘서민·중산층의 개혁’인가. 모두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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