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축구다/김화성 지음/250쪽 7500원 지식공작소
당신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가슴 설레며 교부받은 입장권은 물론이고 이번 참에 대형 텔레비전까지 카드로 긁어 버렸는 지 모르겠다. 부산, 광주, 울산이며 서귀포까지 원정 갈 생각을 하면 쌈짓돈으로는 해결이 안될 수도 있다. 하다못해 친구들끼리 맥주잔이라도 기울이며 ‘집단 발작’에 돌입하고자 하면 푼돈깨나 들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가 더 남았다. 이건 시간은 조금 들지 몰라도 돈은 별로 들지 않는다. 흔한 표현대로 월드컵을 ‘100배 즐기는 법’, 그것은 이 대제전을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탐사한 책 두 권을 읽는 일이다.
|
소설보다 재미있는 평론을 쓰기는 매우 어렵다. 축구 역시 그렇다. 축구보다 더 재미있는 축구 책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다. 축구는 재음미가 불가능하다. 승패와 점수를 알고 보는 재방송은 무의미할 정도다. 축구란 ‘일회적인 엄숙성’, 바로 그 순간에 몰입하는 어떤 것이며 그 시간이 지나면 추억의 영역으로 흘러간다. 게다가 축구는 ‘떼지어 공을 차는 아주 단순한 경기’이며 다만 그것으로 축구에 대해 더 할 말은 없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러나 축구에는 ‘인류의 대제전’이니 ‘평화의 한마당’이니 하는 공허한 수사학으로 손쉽게 주물러 버릴 수 없는 온갖 요소들이 농축되어 있다. 한일 두 나라 축구의 애증어린 대결의 역사를 훑어봐도 이는 금방 증명된다. 개막전으로 치러지는 프랑스와 세네갈은 또 어떠한가. 세계 최강과 아프리카의 다크호스의 대결? 이건 너무 순진한 표현이다. 세네갈에게 있어 축구는 제국 프랑스의 식민지라는 경험으로부터 추출되는 그 어떤 사회적 행동이다. ‘죽음의 F조’를 달구는 것은 비단, 천재 미드필더 베컴(잉글랜드)과 베론(아르헨티나)의 충돌만이 아니라 대처 시대의 뼈아픈 상흔으로 남아있는 포클랜드 전쟁의 연장전으로서 더욱 뜨거워진다. 인종차별과 내전의 상처를 겨우 씻은 남아공과 크로아티아의 월드컵 출전을 어떻게 단순한 ‘공차기 시합’으로 축소할 수 있겠는가.
물론 축구를 그 사회의 역사성에 단순히 대입하는 것은 환원주의적 오류에 빠질 우려가 크다. 그러나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지나치게 단순한 사람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다. 그는 아직 사이먼 쿠퍼의 ‘축구 전쟁의 역사’를 읽지 않았음이 틀림없는데, 그러므로 나는 월드컵 개막을 며칠 앞둔 지금 이 책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각 대륙의 축구 강국을 몇 년 동안 직접 발로 뛰며 써낸 사이먼 쿠퍼의 이 책은 다큐멘터리가 지녀야 할 미덕을 100% 충족시킨 본보기다. 그는 추측이나 섣부른 진단을 거절한다. 아주 친절하고 열성적인 여행 가이드처럼 그는 축구 강국의 주요 인사들, 그러니까 선수, 감독, 임원들을 일일이 만나 그 나라의 축구가 어떤 집합적 역사의 산물이며 국민들의 광기어린 행위가 어떤 사회적 맥락의 결과인가를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잉글랜드 축구와 대처리즘, 스페인 축구와 민족문제, 아르헨티나 축구와 군사정부, 스코틀랜드 축구의 종교 전쟁 등 당신이 만약 이 책을 성의껏 읽는다면 순식간에 현대사를 일별하는 뜻밖의 소득까지 얻게 된다.
게다가 이 책은 당신을 일가친척과 동창회의 오피니언 리더로 만들어준다. 그들이 간밤의 하이라이트에 흥분하고 간신히 외운 세계적인 선수들의 신상명세를 읊는 동안, 당신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지식을 바탕으로(물론 며칠 동안 이 책을 독파한 결과겠지만) 축구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찰하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의 친구들은 존경과 질투가 뒤섞인 감정을 삭이지 못한 채 한국 축구로 화제를 돌릴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김화성 기자의 ‘한국은 축구다’가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한국 축구의 이력을 잘 알고 있다. 최종 엔트리 23명의 장단점까지 줄줄 꿰고 있을 것이다. 16강 가능성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축구를 이해하는 결정적 열쇠, 즉 경기를 지배해 나가는 높은 수준의 기술과 체력에 대해 다각도로 점검하여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일을 김화성 기자가 시도한 것이다. 사실 월드컵을 개최한다지만 큰 서점에 나가보면 축구 책이 십수 권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개들 월드컵의 도전사를 요약하고 그 시절의 스타와 경기를 문자로 단순히 옮겼거나 공차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물론 필요한 책들이다.
그러나 축구와 우리 사회의 연관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우리 축구의 총체적인 수준과 그 질적 대안을 모색한 시도는 거의 없었다. 김 기자의 이 책은 ‘기술과 스피드’라는 한국 축구의 아킬레스건을 테마로 국내외의 다양한 정보를 일관된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원로 감독에서 신예 선수들에 이르기까지 축구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우리 축구의 발전적 대안을 찾고 있다.
말하자면 ‘진단과 처방’을 동시에, 그리고 진지하게 시도하고 있는 꽤 무거운 책이다. 간밤의 하이라이트를 되새기느라 열중하던 주변 사람들은 어느덧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를 냉철하게 진단하는(물론 이 책을 읽은 결과로) 당신의 얼굴에서 진정한 축구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얘기는 간단하다. 당신이 아직 대형 텔레비전을 사지 않았거나 함께 퍼마시며 시청할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면 이 두 책을 읽기 바란다. 뭐라구? 입장권을 구해 현장으로 갈 예정이라구? 그렇다면 더욱 잘 됐다. 혹시 누가 뺏어갈 지 모르니 오른손에는 단단히 입장권을 들고 왼손에는 이 두 권을 책을 들고 가기 바란다. 서둘러야 한다. 전쟁이 코 앞으로 닥쳐왔다.
정윤수(문화비평가·축구칼럼니스트)prague@naver.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