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지구촌 표정]“한골도 못넣다니…” 佛 분노의 물결

  • 입력 2002년 6월 11일 18시 20분


11일은 프랑스의 ‘축구 국치일(國恥日)’이었다.

지난 대회 우승팀이자 세계축구연맹(FIFA) 랭킹 1위, 유로 2000 우승 등 화려한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자국팀이 16강의 문턱도 넘지 못하자 프랑스인들은 경악했다.

더구나 월드컵 72년 역사상 단 한골도 넣지 못하고 탈락한 전 대회 우승팀으로 월드컵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악은 분노로 바뀌었다.

이날 파리시청 앞 광장에서 설치된 대형스크린으로 경기를 관람했던 시민 1000여명은 경기가 끝난 뒤 “대재앙이다” “프랑스의 수치다”를 외치며 흥분했다. 일부 축구팬은 연막탄을 터뜨렸으며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를 위해 로저 르메르 감독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치자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4년 전 “챔피언”을 연호했던 팬들 가운데는 “졌다. 졌다”를 연호하며 자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3-0으로 이긴 뒤 전 국민의 구호가 됐던 “하나 둘 셋, 제로”는 프랑스의 3게임 무득점을 비꼬는 구호로 돌변했다.

남부의 마르세유에서는 300명의 축구팬이 “프랑스가 쓰레기통에 처박아졌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TF1 TV 아나운서도 “프랑스팀의 월드컵은 끝났다. 빨리 돌아오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오전 8시반부터 시작하는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출근에 앞서 카페에 들렀던 한 시민은 “그들이 돌아오면 토마토 세례를 받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다른 축구팬은 “오늘 프랑스팀의 경기는 축구가 아니었다”고 분노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날 경기 전 프랑스언론들은 “지단과 ‘레 블뢰(Les Bleus·푸른 전사들이라는 뜻으로 프랑스대표팀을 지칭)’의 날”이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전반 22분 덴마크에 첫골을 허용하자 “너무 많은 광고와 돈 때문에 선수들이 배가 불렀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마하던 축구팬들은 후반 22분경 덴마크에 두 번째 골을 내주자 “악몽이다. 16강은 완전히 물건너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프랑스언론들은 그라운드에 엎어진 지네딘 지단의 사진을 크게 내보내며 “충격”(TF1 TV) “꿈의 종말”(르피가로) 등의 제목을 뽑았다. 르몽드지는 “‘영웅’들이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무너졌다”면서 새 피를 수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르메르 감독은 내주 중 프랑스축구협회에 사표를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대표팀 주장 마르셀 드자이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나도 다른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깊이 실망했다”며 아쉬워했다.

이날 대부분의 프랑스 회사는 출근을 늦췄으나 경기에 실망한 나머지 출근을 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월드컵 상품을 한아름 쌓아놓은 상점 주인과 점원들은 프랑스의 탈락이 확정되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떨이세일’을 할지 모른다는 얘기도 나왔다.

최대 피해자는 월드컵 독점중계권을 갖고 있는 TF1 TV. 1억6800만유로(약 1932억원)라는 거액을 투자해 독점중계권을 사들인 TF1 TV의 주가는 이날 경기 직후 3.34% 급락했다. 프랑스팀의 첫 패배 이후 지금까지 10.62%가 떨어진 것.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인 가운데 파리에 거주하는 덴마크인과 세네갈인 수백명은 자국기를 흔들며 16강 진출 축하 퍼레이드를 벌였다. 프랑스인들은 이를 맥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는 축포와 함께 경적이 요란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