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싸웠다”…한국 4강 오르기까지

  • 입력 2002년 6월 25일 22시 29분


"졌지만 이겼다."

한국이 비록 독일에게 패해 2002월드컵 결승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월드컵의 '최대 승자'라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전 월드컵에 다섯 번 참가하고도 단 1승도 못거뒀던 팀이 단번에 4강까지 오른 것은 거의 '꿈의 성적'이라 할만 하다. '개최국 프리미엄'이 있다곤 해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일. 이제 한국축구는 세계상위권에 포진했고 주전 선수들은 외국 축구 명문 구단의 집중 스카우트 대상이 될 정도가 됐다. 한국이 4강에 오르기까지 그 원동력은 무얼까.

▽"즐겨라, 또 즐겨라."=한국-이탈리아전이 열린 18일 대전월드컵경기장. 0-1로 리드당한 전반전이 끝나자 한국의 후보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몸을 풀러 나왔다. 간단한 러닝뒤 선수들은 원을 둥그렇게 만들고 '술래'인 한 선수가 가운데 들어가 공을 뺏는 게임을 했다. 휴식시간에 흔히 하는 게임이라 색다르진 않았지만 놀라운 것은 한국 선수들의 표정이었다.

전반전에 안정환이 페널티킥을 실패한데다 이탈리아에 선취골을 내줘 침통한 분위기인데도 선수들은 '술래'를 놀리는 게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어가며 즐거워 했다. 예전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

히딩크 감독이 한국선수들에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같은 '즐거움'이다. 그는 끊임없이 선수들에게 "즐겁게 하라"는 주문을 한다. 훈련할 때도 그렇고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에도 마찬가지다. 훈련과정 역시 즐겁고 재미가 있다. 히딩크 감독은 훈련 중간중간에 농담으로 선수들의 긴장을 풀게 하고 족구도 같이 하며 그라운드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런 그에게 선수들이 붙여준 별명은 '할아버지'. 56세의 나이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하다는 의미다.

종전 혹독하게 몰아치기만 하는 '스파르타식 지도자'에 길들여져 있던 선수들은 히딩크를 만나면서 비로소 '즐기는 축구'에 눈을 뜨게 됐고 이는 경기력으로 연결됐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여유가 철철 넘쳐 흐른 것이었다.

▽각본없는 드라마=한국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연출한 게임들은 하나같이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미국전에서 경기종료 12분을 남기고 감각적인 헤딩골로 동점을 만든 안정환. 골을 넣은뒤 그 짧은 시간에 그는 솔트레이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억울하게 놓친 김동성을 떠올리곤 '쇼트트랙 골세리머니'로 국민을 열광시켰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전에선 '비기기 작전'이 16강 진출에 유용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나와 선수들의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과감히 공격적인 플레이를 할 것을 예고했고 2명이 퇴장당한 포르투갈 수비진 사이로 박지성이 환상적인 개인기로 결승골을 뽑았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은 한국축구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음을 확인한 경기. 과거 세계정상급팀들과의 게임에서 잔뜩 움츠러들어 슈팅막기에 급급했던 한국팀은 오히려 경기를 주도하며 이탈리아를 무너뜨려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선취골을 내주면 절대로 지지않는다는 이탈리아 수비진을 상대로 경기종료 2분전 설기현이 동점골, 연장종료 3분전 안정환이 골든골을 성공시킨 이 경기를 두고 외신들은 이번 대회의 최고 명승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연장포함 120분간의 혈투 끝에 숨막히는 0-0 무승부를 이룬뒤 극적인 승부차기 5-3 승으로 4강에 골인했다.

▽"대∼한민국!"=한국-폴란드전에서 50만명이던 길거리 응원단이 100만, 200만, 500만명으로 점점 불어났고 독일전에선 무려 700만명으로 집계됐다. 국민 7명중 1명이 거리로 나온 셈. 거리는 붉은 물결로 인해 그야말로 거대한 '용광로'로 변했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대∼한민국'과 '오∼필승, 코리아'가 인사가 됐다. 외신들은 하나같이 "이같은 열기를 본 적이 없다"며 놀라워 했다.

국민들의 이런 성원이 대표팀에 커다란 힘이 됐음은 물론. 선수들은 "우리를 버티게 해준 건 바로 팬들의 성원"이라며 감격해 했다. 25일 독일전이 끝난뒤 한국 선수들의 얼굴에 패배에 대한 아쉬움보다 행복함이 더 가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상수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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