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강호들을 차례로 격파해 오랫동안 한국 국민의 마음을 파먹었던 열등감을 여름 소나기처럼 시원스레 씻어준 그의 공적 때문만은 아니다.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시민들의 범접(犯接)을 거부하는 어떤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는 응원단의 마스크로, 진열대의 인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또 하나의 승전보를 염원하는 소녀의 손수건에, 붉은 셔츠를 차려 입은 중년 부인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사랑해요, 히딩크 오빠”를 연발하는 늙은 아주머니의 외침은 차라리 행복에의 절규였다.
▼˝한 잔의 샴페인이 간절하다˝▼
누가 이런 행복을 선물해주었던가, 누가 대한민국 남녀노소의 마음을 이토록 설레게 했던가. 히딩크에 대한 조건 없는 환호 속에는 그를 ‘마이 웨이’의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멜로드라마적 감동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이 ‘무엇’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우선, ‘리더로서의 히딩크.’ 시원찮은 한국 축구가 단기간에 중심으로 도약한 것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이라는 해석으로 리더 기근에 몸살을 앓는 정치권에 대한 비아냥이 서려 있다.
둘째, ‘경영자로서의 히딩크.’ 그의 리더십을 기업 경영에 접목해서 세계화의 발목을 잡는 한국적 병폐를 이번 기회에 철저히 발본색원하자는 의욕으로 결집된다.
셋째, ‘부모로서의 히딩크.’ 선수들의 개별 장점을 십분 살리고, 실수를 하더라도 끝까지 선전을 독려하는 그의 태도는 기성세대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박지성과 차두리가 그의 품에 덥석 안기는 풍경을 두고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진정한 프로, 히딩크.’ 지난 5월 평가전에서 한국팀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 히딩크는 그저 고집스러운 외국인 감독에 불과했다. 개막 며칠 전, “세계가 놀랄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할 때에도 저의를 의심했다.
말하자면, 그는 세계 강호들의 실력과 한국팀의 전력을 정확히 꿰뚫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프로정신은 4강에 이르는 벅찬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제 나름의 각을 강조하는 이런 해석이 모두 일리가 있을 만큼 히딩크의 매력 포인트는 다면적이다. 그런데, 나를 감동시킨 것은 이와는 다른 면모다. 히딩크는 시인이다. 혹자는 달변이라 표현하지만, 달뜬 상황을 언어로 가라앉히는 그의 말은 다름 아닌 시다. 포르투갈을 누르고 16강이 확정되었을 때 다음 목표를 묻는 기자의 상투적 질문에 “당신이 지정하세요”라는 답변이나,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라고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승리 예감을 슬쩍 비친 우회적 표현, 드디어 스페인을 누르고 4강이 확정되던 날 “한 잔의 샴페인이 간절하다”는 그의 짧지만 진한 소감은 성취와 열광의 순간을 오롯이 간직하려는 시인의 축문이었다.
이런 그에게 한국을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한국이 ‘나의 마음을 훔친 것’이 더 중요하고, 몸값보다 조국의 명예를 위해 사투하는 젊은 선수들의 순수성이 더 소중하다. 스페인을 격파하고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그는 ‘붉은 악마’ 응원석으로 조용히 걸어가 한국식 격식을 차렸다. 왜 그랬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의 소임은 여기까지이며, 당신들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음을 확인해준 시인의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우리의 마음을 훔친 축문▼
난국을 극복한 영웅일지라도 남녀노소의 친근한 벗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을 받는다. 신화는 현실이 되었고, 그는 서사시를 썼다. 한국이 그의 마음을 훔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마음을 훔쳤다. 한국 국민이 외로워서도 아니고, 유달리 열정적이어서도 아니다. 왜일까. 분분한 히딩크론이 강조하는 요인들이기도 하거니와, 경쟁 긴장 좌절 재기 등으로 상처 난 한국 현실에 새살을 돋게 하는 시적 감각, 한번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철학을 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보장할 수는 없지만,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자신감 회복의 힘든 여정을 절제된 언어로 겨우 달래며 걸어왔던 그는 시인이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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