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공동성명 30주년]성과와 한계

  • 입력 2002년 7월 3일 18시 39분


72년 7월4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동아일보 자료사진
72년 7월4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동아일보 자료사진
7·4공동성명에서 합의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은 남북 비밀접촉을 위해 72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과 김일성(金日成)간의 면담자리에서 즉석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후락 부장을 수행했던 이동복(李東馥·남북조절위원회 남측대표) 명지대 교수는 회고록 ‘통일의 숲길을 열어가며’에서 이같이 증언했다.

당시 김일성 수상이 사실상 6·25 남침사실을 인정하자 이 부장이 “그럼 통일의 원칙은 평화적으로 합시다”라고 제안했다는 것.

이에 김일성 수상은 “그럼 평화의 원칙은 됐다. 남한은 미 제국주의자가 시키는 대로 따라한다고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 ‘자주’의 원칙도 합의됐다”고 정리한 뒤 “나머지 하나는 ‘민족대단결’”이라고 말해 3대원칙의 순서가 만들어졌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그러나 언뜻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인상을 주는 조국통일 3대원칙은 사실은 북측의 철저한 준비의 결과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3가지 통일원칙은 김일성이 이미 1961년 9월에 열린 노동당 4차 당대회에서 밝힌 내용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남측 대표단 실무자들은 “공산주의와의 회담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에 합의해야지 ‘원칙’에 합의하면 나중에 딴 소리가 나온다”며 반대했으나 묵살당했다는 후문이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3대원칙’ 이후락-김일성 면담서 즉석 결정▼

7·4공동성명에서 합의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은 남북 비밀접촉을 위해 72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과 김일성(金日成)간의 면담자리에서 즉석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후락 부장을 수행했던 이동복(李東馥·남북조절위원회 남측대표) 명지대 교수는 회고록 ‘통일의 숲길을 열어가며’에서 이같이 증언했다.

당시 김일성 수상이 사실상 6·25 남침사실을 인정하자 이 부장이 “그럼 통일의 원칙은 평화적으로 합시다”라고 제안했다는 것.

이에 김일성 수상은 “그럼 평화의 원칙은 됐다. 남한은 미 제국주의자가 시키는 대로 따라한다고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 ‘자주’의 원칙도 합의됐다”고 정리한 뒤 “나머지 하나는 ‘민족대단결’”이라고 말해 3대원칙의 순서가 만들어졌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그러나 언뜻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인상을 주는 조국통일 3대원칙은 사실은 북측의 철저한 준비의 결과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3가지 통일원칙은 김일성이 이미 1961년 9월에 열린 노동당 4차 당대회에서 밝힌 내용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남측 대표단 실무자들은 “공산주의와의 회담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에 합의해야지 ‘원칙’에 합의하면 나중에 딴 소리가 나온다”며 반대했으나 묵살당했다는 후문이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7·4공동성명 이후 주요 남북대화
일 시주요 남북대화 또는 합의
1972.7.4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8.29남북적십자 1차 본회담(평양)
1984.9.29∼10.4북적 수재물자 대남 지원
1985.9.20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서울 평양 동시교환방문
1990.9.4∼92.9남북고위급회담(1차-8차)
1994.6.28남북정상회담 개최 예비접촉
2000.4.8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2000.6.13∼15남북정상회담(평양). 6·15공동선언
2000.7.29∼2001.11남북장관급회담(1차-6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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