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동학이 탄생했단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가 경북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龍潭亭)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동학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이제 용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그 자리에는 1974년에 새로 크게 지었다는 용담정이 절경 속에 서 있다. 경주의 물이 다 마를 정도로 가뭄이 들어도 언제나 물이 흘러나온다는 그 곳은, 풍광만 보고도 너무 좋아 당장 동학에 입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용담정 입구에 있는 ‘천도교용담수도원’의 김근오(金根五·78) 원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나 갈 곳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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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단군신화-마니산 참성단과 인각사 |
“송월주 스님(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이 오셔서 그러시더군요. 이렇게 기운이 센 데서 어떻게 견디냐구요. 이 산에는 절들이 들어왔다가도 10년을 못 견디고 떠나고 말지요. 그런데 수운 선생은 여기에 자리를 잡고 동학의 뿌리를 내리셨어요.”
그 거센 기운이 체질에 잘 맞는 덕인지, 김 원장은 80이 가까운 노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동학 신도였던 부친의 유언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입교했다는 김 원장이 용담정을 지킨 지 벌써 30년. 용담정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했다.
“동학은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광복 후에는 별다른 역할을 못했어요. 초등학교 하나 못 세웠지요. 그러니 신도도 많이 줄었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반성을 해야 할 일이지요.”
최제우는 용담에서 동학을 연 지 2년도 안 돼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용담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유림과 관의 압력을 받았고, 1862년 이를 피해 찾아간 곳은 전북 남원의 은적암(隱蹟庵)이었다. 그는 용담정과 은적암에 머물던 1860∼1863년에 ‘용담유사(龍潭遺辭)’와 ‘동경대전(東經大典)’을 지으며 동학을 완성해 갔다.
그는 특별한 기운이 모이는 곳만 찾아다녔는지 은적암 터도 용담정에 못지 않은 듯했다. 안내판만 서 있는 은적암 터에는 교룡산 산신단(蛟龍山 山神壇)의 흔적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신라시대 때 창건된 선국사(善國寺)란 오래된 절이 있다. 그는 선국사의 암자인 덕밀암(德密庵)에 머물면서 그 이름을 은적암으로 바꿔놨다. 그는 이렇게 불교와 무속과 자신의 학문적 바탕이었던 유학의 힘을 합쳐 외세와 맞서려 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곳은 교룡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 때 주요한 거점이 됐을 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는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이 남원성 공략을 위해 주둔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네가 곧 한울님’임을 설파했던 동학에는 실제로 당시의 여러 사상들이 포괄돼 있다. 몰락한 양반 출신인 최제우의 유교적 소양과 당시 부패한 계급사회의 변화를 거세게 요구하던 민중들의 변혁사상, 난세에 위안을 삼곤 하는 도가의 무위이화(無爲而化) 정신, 유불도의 융합이라는 한국사상의 전통, 그리고 서학과 서양의 득세에 대한 위기감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은 바로 당시 조선의 역사적 상황이었고 철학적 현실이었다. 동학이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현실을 외면했던 조선 성리학과 달리 바로 이런 시대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이 그런 동학사상의 현실적 표출이었는지, 아니면 변혁을 꾀하던 사람들이 동학의 조직과 이념을 이용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농민전쟁을 통해서 동학은 짧은 기간이나마 현실 속에서 그 이념의 상당부분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1800년대에 계속된 농민항쟁을 거치며 지배층의 수탈에 대해 집단적인 저항의식을 가지게 된 농민들이 시대적 비판의식을 반영한 동학과 결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학 조직의 고부접주(古阜接主)였던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은 1894년 초 학정에 못이겨 일으켰던 고부 봉기를 승리로 이끌며 농민군 총대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지휘 아래 고부성에 이어 태인을 점령한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과 맞서 대승을 거두면서 1개월만에 호남지역을 장악했다.
농민들의 함성이 들판을 가득 메웠던 ‘황토현 전적지’. 제세문(濟世門), 보국문(輔國門)을 거쳐 들어가면 제민당(濟民堂), 구민사(救民祠) 뒤 제일 높은 곳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든 동상이 서 있고, 농민들은 동상 뒤 벽에 새겨진 채 여전히 녹두장군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 전적지보다 더 넓은 건너편 벌판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짓는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시대는 동학사상보다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더 필요로 하는 모양이었다.
고부에서 황토현을 거쳐 정읍, 태인, 전주로 농민군이 달렸던 길을 되밟아 가며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호남의 벌판을 보면서 예전에 이 길을 함께 걸었던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이 넓은 평야에서 매년 쏟아지는 그 많은 곡식을 두고도 굶주림에 못 이겨 농민전쟁을 일으켜야 했다는 게 말이 되냐?”
예나 지금이나 부와 가난은 총량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