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덟은 광기와 무력감이 뒤섞인 나이라고 했던가.
서른 여덟 살 사내에게 다가 온 ‘실직’과 ‘아내와의 불화’는 어떤 것일까. 그것들은 수시로 우리 삶에 찾아 올 수 있는 평범한 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 왔던 인생궤도를 확 바꿔 버릴 수도 있는 특별한 사건일 수도 있다.
미국 대학강사(문학) 윌리엄 히트문은 서른 여덟 되던 어느 여름날, 자신이 출강하고 있던 대학으로부터 수강생 수가 적어 폐강한다는 통고를 받는다. 아홉달 전부터 별거 중인 아내에게 하소연이나 하려고 전화를 걸지만 아내는 시종일관, 이러저러한 남자들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인생은 지루하고 허무하고 쓸쓸했다. 불면의 밤으로 뒤척이던 그는 술병을 드는 대신, 갑자기 여행을 떠나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상을 벗어 던진다는 것, 얼마나 짜릿한 모험인가, 어쩌면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소형 밴으로 국토를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이왕이면 ‘이국 땅에 홀로 떨어진 듯한 지독한 고립감을 맛보기 위해’ 넓고 쉬운 고속도로 보다 좁은 국도를 따라 ‘자칫 한눈을 팔면 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평범한 마을들을 찾아 다니기로 한다.
여행지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6년째 배를 만들면서 세상을 유랑할 꿈을 꾸고 있는 부부, 총을 품고 다니며 죽을 때를 기다리는 운명론자, 인종차별에 대한 울분에 찬 흑인, 생명만이 생명을 살릴 수 있으므로 동물을 죽일 땐 동물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호피족 대학생….
나홀로 여행은 고행(苦行)이었다. 광대한 대지앞에서 인간의 왜소함에 몸을 떨고, 무시무시한 장대비가 차의 강철지붕을 때리는 칠흙같은 밤에는 두려움에 밤을 지샌다. 입에 곰팡이내가 날 정도로 수다가 떨고 싶은 날엔 아무데고 들어가 누구에게라도 이야기를 걸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그는 ‘여행(travel)’과 ‘고생(travail)’이란 단어가 어원이 같다는 호머의 시구를 확인이라도 하듯 미칠 듯한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자제력을 상실했다고 토로한다.
그 절대고독 속에서 광막한 길을 달리며 그가 깨달은 것은 뜻밖에도 ‘일상에 대한 새로운 눈뜸’이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삶의 진정한 의미는 비범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속에 있다는 깨달음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세숫대야를 타고 대양을 건넌 것도 아니고, 염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사막을 횡단한 것도 아니며, 자전거를 타고 남아메리카 남단의 혼곶을 탐험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내 나라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본 것이었다.’
그가 본 것은 다름아닌,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눈으로 보는 세상 속에 담긴 깊은 통찰이었다.
‘여행은 그냥 음악과 같다’(시골의 허름한 카페 여종업원), ‘날씨가 거칠어야 좋은 재목과 인물이 난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주던 백발 노인), ‘도시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마을에선 별 중요한 일이 안 일어 난다고 생각하나 보다. 하지만, 남녀간의 사랑, 갓난애의 출생, 시시한 인간들의 죽음, 뭐 이런 것들도 중요한 것 아닌가’(시골의 여자 우체국장)….
그가 떠나기 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그 일상,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그 일상속에는 이렇게 보석같은 언어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긴 여행을 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당초, 국토 횡단이 아니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기로 결심한 것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리라는 희망때문이었다. 이 책이 특정한 장소를 소재로 특별한 생각을 펼쳐 놓으면서 도피나 신비를 심어주는 여타 여행기나 답사기들과 다른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에게 ‘떠남’은 ‘돌아옴’이었지만, 다시 돌아온 일상은 옛날 그대로는 아니었다. 여행길에서 그는 ‘자신을 좁은 영역에만 가둔 채 절망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자기자신)’을 보았으며 늘 자기만 생각하고 고집을 앞세웠던 것을 후회한다. 그가 여행을 통해 얻은 미덕은 ‘양보’였다.
‘폐쇄된 자아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인간이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시각(視覺)이 아니다. 자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 나만의 틀에서 벗어나 영혼의 눈을 떴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의 책은 출간 후 (1982) 20여년 동안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일약 그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부(富)는 물론이요, 전처와는 사이좋게 갈라서고 새 아내도 얻었다.
사족: 책 제목 ‘블루 하이웨이(blue highway)’는 저자가 만든 말이다. 미국의 옛 지도를 보면 주도로는 붉은 색, 국도는 푸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새벽녘이 될 때와 황혼이 된 직후 아주 짧은 순간에 실제 도로색깔이 하늘 빛과 같은 색(블루 하이웨이)으로 물든다는 저자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신비한 푸른 빛의 도로를 보면서, 저자는 ‘나 자신을 잃어 버렸다’고 적고 있다. 이 작품의 성공 후 ‘블루 하이웨이’는 미국 사전에 ‘시골길(backroads)’과 동의어로 올라갔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