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대통령만 몰랐다?

  • 입력 2002년 7월 22일 18시 25분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갓 1년이 지난 94년 봄, 우루과이라운드(UR) 최종이행계획서(CS) 문제로 농수산부장관을 비롯한 고위관리들이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한 적이 있다. 김 대통령은 대선 유세 때 국내 쌀시장 보호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던 정부의 쌀시장 정책이 ‘개방 절대 불가’에서 ‘불가 노력’, ‘최소 개방’으로 계속 밀리다가 CS를 제출할 때는 ‘상당 부분 개방’상태까지 갔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계속 주장하다가 결국 거짓말임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김 대통령은 “나도 모르는 일을 저질렀다”면서 김양배(金良培) 농림수산부장관을 전격 해임했다. 이회창(李會昌) 총리는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사과성명까지 발표했다. 김 장관은 문민정부의 도덕성과 투명성을 훼손한 책임을 지고 3개월14일간의 단명 장관으로 불운하게 퇴장한다.

▼누구나 아는 거짓말▼

김 장관은 CS 제출 하루 전 대외협력위원회에는 그 내용을 보고했지만 대통령과 총리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관이 어떻게 단독으로 대통령의 대선공약까지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문민정부는 김 장관을 희생양(Scape goat)으로 삼아 농민의 분노를 얼버무린 것이다.

요즈음 문제가 된 중국과의 마늘협상도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연장하지 않기로 합의해 놓고 이를 2년 동안 숨기기로 한 최고책임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말이 많다. 외교통상부 측에서는 경제장관회의까지 보고된 일이라 하고 당시 농림부장관이었던 사람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하니 기가 차다. 우선 진상부터 철저히 가려야 한다.

중국과 합의하도록 지시하거나 최종 방침을 정한 사람은 누구이며 이를 숨기기로 한 경위는 어떻게 된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늘협상은 농가의 반발이나 피해액을 생각할 때 청와대가 모르게 추진될 일이 아니다. 만일 일개 부처의 협상대표선에서 중국과의 합의를 매듭짓고 그 선에서 결과를 ‘쉬쉬’하기로 했다면 현 정권은 기강도, 체계도 없는 ‘콩가루 정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정(市井)사람이라도 청와대나 대통령과 사전 상의를 하지 않는 그런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약값 문제도 그렇다. 보건복지부는 약값 인하를 골자로 한 4000억원대의 건강보험 재정적자 절감대책을 청와대에 보고했으나 대통령비서실이 제동을 걸어 대통령 보고를 무산시켰다고 한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의 일정이 맞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일정이 안 맞으면 그런 보고는 다 자동 폐기되는가. 정부의 주무부서가 고심 끝에 만든 정책안이 대통령비서실에서 사전 차단되고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올라가지도 못한다면 과거 독재정권의 행태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에게 세세한 내용까지 보고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용보고는 그렇다 쳐도 관련부처가 외국과의 합의 내용을 두고 서로 왈가불가하고 있는 상황이니 어떻게 정부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겠는가. 수시로 열리는 것이 경제장관회의이고 대책회의다. 대부분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도 매주 한번씩 열린다. 평상시 대통령비서설의 주요 임무는 정부 각 부처의 업무를 챙겨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김 대통령이 그처럼 국민의 이해와 직접 관련된 마늘협상이나 제약회사 로비 문제를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면 그의 국정 수행에는 이미 적신호가 들어 온 것과 같다. 김 대통령의 개인 능력에 한계가 왔든, 아니면 바로 눈앞의 사람들이 김 대통령에게 통하는 길을 차단했든 어느 경우나 국정이 단절되고 마비된 심각한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은 솔직히 시인해야▼

김 대통령은 아들 문제에 대해 “사전 정보를 받지 못했다. 참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문제도 아닌 혈육과 관계되는 문제인데 대통령이 사전 정보를 못 받았다고 한다.그러나 김 대통령의 아들들 문제는 한나라당이 기회 있을 때마다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다. 언론에도 수없이 올랐다. 누구보다 여론에 민감하다는 김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 문제에 대해 그처럼 잘 모르고 있었을까. 이번 마늘협상이나 외국 제약회사의 로비 문제도 아들 문제처럼 보고를 못 받았다고 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김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정직한 정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김 대통령은 정말 마늘협상의 결과를 ‘쉬쉬’하기로 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는가. 다국적기업의 약값 압력에 대한보고는 전혀 없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보고 받고도 제대로 챙기지를 못했는가. 사실부터 솔직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정직한 정부다.

남찬순 논설위원 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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