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축제무드에 들떠있을 즈음 뉴욕의 삼성본부엔 비상이 걸렸다. 전 미주 사장단의 긴급회의가 열린 것이다. “미국 시장에서 삼성제품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책이 있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회의장 분위기는 침통했다. 머리를 맞대고 심야마라톤회의를 진행했다. 신기술, 구조조정, 과감한 신규투자. 이를 위해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조용한, 그러나 비장한 결의가 그룹 전체로 파급되었다. 앞마당에선 민족 초유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데 뒷마당에선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앞질러 그런 고민을 했기에 요즈음에 ‘잘 나간다고 교만 떨지 말자’는 행복한 고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월드컵 흥분에 부풀어 있고…▼
당시 올림픽으로 뜨기 시작한 우리는 고공비행을 했다. 1만달러 고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거칠 게 없었다. 아, 하지만 그게 얼마 갔던가. 수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경제는 최악으로 떨어졌다.
요즈음 우린 월드컵의 흥분으로 한껏 부풀어 있다. 이제 세계 최고는 그림의 떡이 아니다. 신문을 펼쳐도 화려한 스포츠면이 먼저다. 온통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러다 혹시 올림픽의 재판이 되는 건 아닌지, 정신을 차려 경제면을 훑어봤다.
7월 중순 어느 일간지의 경제면. 우선 활자 큰 것부터 보니 경제면 1면 톱기사 ‘10년 후 중국 회사 될 각오-LG전자, 본사 기능 대폭 이전, 한국엔 신제품기지만 남기고’. 제목만 봐도 섬뜩하다. 산업공동화란 말이 머리를 스쳐가기 때문이다.
몇 해 전 경기 부천시의 축구공 제작회사에 가 본 적이 있다. 한데 사람이 없었다. 연구개발부 직원 몇 명뿐이고 공은 중국에서 만들어 온다.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이번 월드컵 특수로 축구공 수입이 엄청 늘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텅 비어있던 그 회사가 눈에 아른거렸다. 노동집약형, 공해산업 등은 미개발국으로 옮겨가는 게 세계적 추세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돈 되는 일이면 뭐든 했지만 이젠 골라서 하게 될 만큼 형편이 나아졌으니 한편 기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역시 지울 수 없다.
다음 한복판 박스기사 ‘외국인 주주에게 일단 물어봐’. 외국인 투자지분이 높아지면서 회사의 의사 결정과정에서 이들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것. 직언을 하자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친절하게도 외국인 지분이 50% 이상인 회사를 도표로 보여 주는데 삼성전자, 현대 차, 포스코. 이들은 한국의 간판기업이요, 우리의 자존심이 아니던가. 이 회사들이? 아무리 다국적기업화가 대세라지만 그래도 한국 정서로는 어쩐지 서운하고 아깝고 자존심이 상한다.
왼편 큰 기사 ‘서울은행 매각 난항-공정성 시비에 노조 반발 겹쳐’. 합치면 인원을 감축할 것을 우려해 노조가 반대한다는데 좀 대국적으로 볼 순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인생 100년, 이제 75세까지 현역으로 뛰어야 하는데 부실한 직장에 잠시 목을 매느니 지금부터 인생 후반전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게 아닌가.
다음 장, 2면으로 넘어가면 톱기사 ‘기업 채산성 악화-설비투자 늦출 듯’. 환율 급락에 따른 것이라는데 수출 의존도가 큰 우리 경제에 환율 1100원대가 예상된다니 이 역시 걱정이다.
그 아래 박스기사 ‘놔두자니 부실, 말리자니 경쟁 저하’. 은행대금업 때문에 나온 걱정이다. 그 아래로 ‘창투사 관리 강화’, 부실이 많다니 이 역시 걱정이다.
▼´올림픽 거품경제´再版 막자▼
한복판의 큰 기사. ‘워크아웃 졸업, 영창악기’. 경제면에서 처음 읽게 되는 기분 좋은 기사다. 축하합니다. 하지만 재기하기까진 뼈아픈 구조조정, 품질향상이 비결이었다는 엄숙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우측 하단의 반가운 소식, ‘1분기 노동생산성 11.9% 증가’. 한데 내용은 인력사용을 줄인 탓이라 경쟁력 향상과는 무관하다니, 좋다 말았다.
3면 톱기사. ‘삼성전자 관련사, 헝가리로 속속 이동’. 거기에다 대규모 생산단지를 조성한다니 LG전자 기사와 함께 산업공동화가 두렵다. 박스기사, 88올림픽 거품 교훈 삼아 월드컵 후의 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충고가 실려 있다.
이날 주가는 7.28% 하락. 그만 접어야겠다. 경제는 어두운 데 국민은 들떠 있고 올림픽 악몽의 재판이 두렵다. 자신감은 좋다. 그러나 자만은 금물이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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