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노비문서

  • 입력 2002년 7월 30일 18시 55분


미국 메이저리그에 선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프리에이전트(FA)제도가 도입된 것은 불과 20여년 전이다. 그때까지는 프로야구가 독점금지법의 대상이 아니어서 선수들은 한번 구단과 계약하면 은퇴하지 않는 한 그 팀을 떠날 수 없었다. 10년간의 소송 끝에 선수들이 다른 구단과 계약할 수 있는 FA제도를 쟁취한 게 1980년이니 메이저리그가 출범한 지 한 세기도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이지만 선수들이 구단주의 족쇄를 벗어나기는 이렇게 힘들었다.

▷우리 프로야구도 별로 다를 게 없다.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선수들은 사실상 구단의 꼭두각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2년 전 선수들이 미국과 일본처럼 노조를 만들려고 하자 구단들은 “아예 프로야구를 없애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노조가 아닌 선수협의회로 이름을 바꿔 출범하기는 했지만 여기에 가입한 선수들은 또 구단의 눈 밖에 나 알게 모르게 곤욕을 치렀다. 김병현을 비롯해 미국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은 괘씸죄 대상이다. 이들은 돌아와도 5년 동안 국내팀에서 뛰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국내 프로야구를 돕지 않고 외국팀으로 간 때문이라니 구단이기주의의 극치가 아닌가 싶다.

▷선수들은 현행 규약집과 계약서를 ‘노비문서’라고 부른다. 노비문서는 전통사회에서 주인이 남녀 종의 신분을 적어 사고팔거나 상속, 증여할 수 있도록 한 증서 아닌가. 그러기에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많게는 한 해에 수억원까지 버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스스로를 노비에 비유한 것은 심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자. 한 구단에 지명되면 싫어도 2년 동안은 떠나지 못하는 것이나, 연봉협상이 결렬되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고 최악의 경우 실업자가 될 각오까지 해야 하는 신세를 선수 입장에서는 ‘현대판 노비’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게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그저께 국내 프로스포츠 종목의 불공정 규약에 대해 시정명령과 경고조치를 내렸다. 공정위 결정이 선수들의 권익보호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디 스포츠뿐일까. 전속사에 묶여 온갖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연예인 또한 선수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 정도면 나은 편이다. 포주에 갈취당하는 매춘여성, 인권 사각지대의 외국인 노동자…. 현대판 노비문서의 희생자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이들의 인권을 회복시켜 주는 일은 누구의 몫인가.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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