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의 5분의 1도 아직 다 읊지 못했다. 5년 전만 해도 이 정도의 가사일에서 자유로운 주부는 많지 않았다. 가끔 외식하기, 급할 때 친정에 아이 맡기기 정도가 가사 노동을 ‘아웃소싱’하는 경우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사 노동을 ‘외부 조달’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졌다. 유통업체들은 상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조리된 가정식 대용품과 1회용 살균 행주 등 가사 노동 대체품 매장을 늘렸다. 베이비시팅 청소대행 식단작성 등 가사 대행 서비스 업체도 많아졌다.
▽먹을거리〓롯데백화점 본점은 지난해 하반기 식품관을 개편, ‘홈 밀 리플레이스먼트(HMR)’ 코너를 2배로 늘렸다. HMR는 당초 외식에 싫증난 독신자에게 가정식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개발된 완전 조리, 반(半)조리 식품.
김치도 매장에서 직접 버무려 주고, 갈비도 양념에 재워 바로 담아준다. 신명용 롯데 식품팀장은 “올 상반기 HMR 매출은 지난해 상반기의 3배 이상”이라며 “맞벌이 주부를 겨냥, 집에서의 조리 과정을 덜어주는 품목을 늘렸다”고 말했다.
신세계이마트도 1999년부터 HMR 코너를 직영하며 200여 HMR 식품을 판매한다. 99년 약 230억원 수준이던 HMR 매출은 올해 1800억원대가 될 전망.
직접 요리하더라도 재료 다듬는 수고가 줄었다. 현대백화점 본점에서는 통마늘을 팔지 않는다. 한 번 손질한 ‘깐 마늘’, 한 번 더 손질한 ‘다진 마늘’을 판다. 파도 흙대파, 깐 대파, 양념 대파 등으로 세분했다. 식품팀 김형욱 과장은 “파 마늘 등은 비싸도 손질한 것이 날것보다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물리지 않는 식단 짜기도 아웃소싱할 수 있다. CJ푸드시스템은 아침식단, 저녁식단, 다이어트식단, 당뇨식단 등으로 나눠 식단을 짜준다. 반가공한 식자재도 배달한다.
▽아이 키우기와 기타 집안 관리〓예전의 엄마들은 자녀가 학교 갈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집에서 하루종일 돌봐야 했다. 유치원에 보내더라도 길어야 취학 직전 1년이었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유치원이 3년제로 운영된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유치원을 ‘3학년’까지 다니는 셈. 직장경력 7년차인 김모씨(32)는 “만 4세인 큰아이가 1년반째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며 “만 두돌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고, 유치원 3년 중 1년쯤은 영어유치원 등으로 ‘전학’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정기적으로 다니는 교육·보육기관 외에 필요할 때마다 아이를 돌봐주는 베이비시팅 업체도 100여곳에 이른다. 인터넷으로 회원가입을 하면 분말 인스턴트가 아닌 ‘조리 이유식’을 배달해주는 이유식 배달 업체도 있다. 3년 안에 ‘가정식 이유식’ 시장은 100억원 규모로 커질 전망.
다른 집안 관리를 맡아주는 서비스도 다양하다. e현대백화점은 전문 청소장비와 약품으로 싱크대 화장실 베란다유리 등을 청소해준다. 포털사이트들은 집안의 경조사와 주요 일정을 잊지 않도록 도와준다.
▽가사 노동도 전문직〓가사 노동 아웃소싱은 맞벌이 부부 증가와 함께 수요가 크게 늘었다.
85년과 2001년 사이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비농가)은 38.8%에서 46.8%로, 기혼여성 취업자 수는 약 360만명에서 약 582만명으로 각각 늘었다. 통계청의 ‘사회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95년 여성들은 여성 취업의 저해요인으로 54.6%가 가사노동부담을 꼽았으나 98년에는 이 수치가 42.2%로 줄었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이와 함께 공급측면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여성구직자가 많아지면서 이들이 취업할 수 있는 가사 서비스 영역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가사 영역을 외부업체가 담당하게 되면서 과거 ‘경험에 기반한 노하우’로 하던 일들이 전문영역화(化)됐다.
베이비시팅 서비스를 하는 ‘요술램프’는 유아교육을 전공한 전문가가 놀이와 교육을 도와주고 부모들에게 놀이 방법 컨설팅까지 해준다. 가정식 유아식 업체 ‘아기밥’은 소아과 전문의 4명, 영양사 13명, 조리사 10명이 아기의 성장단계별로 만든 이유식을 배달한다. 신세계이마트 각 점포의 HMR코너에서는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3, 4명의 조리사와 15명의 조리보조자가 조리와 판매를 겸한다.
한국여성개발원의 문유경 연구위원은 “가사 노동이 ‘시장’으로 편입되면서 기존에 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여길 만큼 폄하되던 가사노동 가치가 인정되는 효과가 있다”며 “그러나 가정을 경영, 관리하는 ‘핵심역량’은 여전히 가정에 남게 되므로 주부만의 일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맡는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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