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 30년… 히피들이 만든 이상향▼
히피의 발상지는 샌프란시스코. 71년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였던 스테펀 개스킨과 히피 300여명은 버스 수십대를 나눠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캐러밴’으로 불린 이들 행렬은 장장 32㎞에 달했다. 미국 전역을 헤집고 돌아다니다 3개월만에 도착한 곳이 테네시주의 깡촌 서머타운.
이들은 이곳에 길을 내고 땅을 파서 농장을 일궜다. 그리고 코뮌(공산공동체)이라고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공동체의 실험을 시작했다. 뒤에 합류한 사람들은 ‘빈곤의 서약서(Vow of Poverty)’에 서명하고 이곳 주민이 됐다.
“스쿨버스와 군용 텐트를 거쳐 한 집에 60명이 살던 시절이 있었다.”(더글러스 스티븐슨·48·빌리지 미디어 사장)
팜에서는 환각성이 강한 마약 외에는 어떤 실험도 용납됐다. 개스킨을 비롯해 일부 주민들은 남자 2명과 여자 2명으로 한 부부를 이뤘다. 팜의 소역사를 펴낸 마이클 트로코트는 “4명이 한 가족으로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실험한 것으로 난혼이나 프리섹스와는 다른 개념이었다”고 말했다. 결국은 남녀 2명의 전통적 부부관계로 귀착됐다.
그들은 인공피임 대신 자연피임을 선호했다. 오늘날 기초체온법으로 알려진 피임법은 여기서 본격 개발됐고 70만부나 팔린 책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개스킨의 부인 이나 메이는 마취제를 전혀 쓰지 않는 자연분만법을 개발했다. 6개국어로 50만권이 팔린 책자를 통해 소개된 이 방법은 ‘개스킨 방법(Gaskin Maneuver)’이라는 의학용어를 탄생시켰다. “제왕절개수술률이 한국에서는 40%가 넘지만 팜의 조산원은 1.7%에 불과하다.” 이나 메이의 말이다.
팜은 채식주의를 실천하면서 단백질을 얻는 방법으로 다양한 콩요리법을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제품이 아닌 아이스크림의 상용화에 성공했고 미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두부요리를 전파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팜은 할 수 있는 모든 ‘좋은 일’에 뛰어들었다.
미혼 임신부를 위한 무료 분만과 양육은 지금도 미국인의 뇌리에 박혀있다. 이곳에서 아기를 낳은 수백명의 여성 중 하나인 빅키(46)는 77년 이후 이곳에 눌러앉아 지금 팜의 정문을 지키고 있다.
이상주의에 불타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80년대 초반 1500명까지 불어났다.
81년 11월29일자 뉴욕타임스는 뉴욕 슬럼가에 히피가 출몰한 신기한 사실을 보도했다. 팜이 파견한 이들 자원봉사자는 경찰마저 외면하는 우범지역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가장 먼저 환자에게 달려가는 응급구조요원으로 봉사했다.
앞서 76년 과테말라에서 1만명 이상 숨지는 대지진이 발생하자 팜 주민 100여명이 달려갔다. 팜의 봉사조직인 플렌티 인터내셔널의 피터 슈바이처 사무총장(59)은 “지금도 벨리즈와 방글라데시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포위돼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변혁기가 닥쳐왔다. 83년 공동체의 부채가 60만달러로 늘어나 파산 위기에 몰린 것. 팜 해체의 기로에서 주민들은 공동체를 살리되 이상을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채산성이 맞지 않는 농사는 중단했고 주민들은 스스로 호구지책을 마련하고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이른바 ‘83년의 전환(changeover)’이었다.
이후 팜에는 농업 대신 방사능 누출 탐지기를 생산하는 SEI를 비롯한 중소기업들이 들어섰다. 그래서 3년만에 빚은 탕감했지만 이상이 꺾인 주민들 대다수가 비통한 심정으로 팜을 등져 주민수는 400명으로 격감했다.
이후로도 계속 줄어 최근에는 160명 선에서 안정되고 있다. 지금은 팜 주민이 되려면 최장 2년까지 임시 주민으로 거주하다가 주민 전체 투표에서 3분의2의 찬성을 거쳐야 하는 반(半) 폐쇄적 공동체로 바뀌었다. 남아있는 주민들은 더 이상 ‘전환’ 이전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고의적으로 가난했던 생활은 원치 않는다. 우리에겐 사생활이 없었다.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점차 가족만의 공간이 필요했다.”(빅키)
“생일날 부모가 돈을 보내오면 공동체가 가져갔다. 우리에겐 자유가 없었다.”(프랭크 마이클·64)
“자본주의 사회에 둘러싸여 자본주의 이외의 길은 불가능했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다.”(스티븐슨)
이들은 거창한 이상은 버렸지만 서로 신뢰하고 협동하는 공동체 정신은 살아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임무를 버리지 않았다. 다만 보다 우아하게, 개인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축구심판 숀 매카티·55)
“평화와 자급자족의 정신, 정직 그리고 이웃에 대한 배려는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슈바이처)
“세계를 구하겠다”는 높은 이상은 버렸지만 공동체로서의 영속 가능성은 더 높아진 팜. 과연 성공일까 실패일까.
팜(테네시주)〓홍은택기자euntack@donga.com
▼팜 지도자 스테펀 개스킨▼
스테펀 개스킨(67·사진)은 팜의 교사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가 60년대말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영어학과 교수였을 때 개설한 과목에서는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심리학,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개스킨씨는 넘쳐나는 학생과 일반 청중을 소화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큰 강당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마침 69년 이곳에서 열린 미 종교아카데미 연례회의에 참석한 종교지도자들이 수업을 지켜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그를 초청했다. 이를 계기로 개스킨씨와 300여명의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미국 일주에 들어갔다. 70년 1차 캐러밴을 조직해 60대의 버스등 모두 100대의 차량에 탑승, 워싱턴 DC와 조지아 미조리 콜로라도주 등을 순회하는 여정이었다.4개월 동안 주파한 거리만 1만2000여㎞. 이들은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한지 2주만에 2차 캐러밴을 조직, 테네시주로 떠나 팜을 개척했다.
-왜 팜을 건설했는가.
“1차 캐러밴 여행 중 한가족이라는 진한 유대감이 생겨났다.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었다.”
어린 히피들이 나이가 들자 그는 점차 팜의 결정권을 양도해왔고 지금은 공동체 운영에서 손을 뗐다.
-사람들은 당신을 더 이상 교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나를 교사로 부르길 원치 않았다.”
-당신의 철학은….
“나는 사람들의 기본적이고 심오한 연결을 믿는다. 영혼의 대화를 믿는다. 하지만 조직화된 종교를 믿지 않는다. 나는 종교가 삶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4명으로 한 부부를 이루려는 실험은 왜 실패했는가.
“남녀 2명의 부부관계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는 53년 한국전쟁에 해병대원으로 참전했으며 74년에는 마리화나 재배 혐의로 기소돼 11개월간 복역한 전력이 있다.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녹색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 차점자로 고배를 마셨다.
-2004년 선거에도 출마할 것인가.
“물론이다. 랠프 네이더(2000년 녹색당 후보)는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정치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있다.”
-팜이 앞으로도 살아있을 것으로 믿는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팜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팜의 이상이 퇴색했다는 비판도 나오는데….
“공동체로서의 실험이 실패한 게 아니다. 보다 유연해진 것일 뿐이다. 실례로 이미 30명의 박사와 20명의 변호사를 배출해 지
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팜으로 가는 길▼
팜은 테네시주의 주도 내슈빌에서 북쪽으로 100㎞ 떨어져 있다. 팜의 생태마을훈련센터(ETC)에 연락하면 내슈빌의 국제공항까지 차로 마중나온다. 편도 요금 40달러(약 4만8000원). 만약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컬럼비아까지 갈 수 있으면 그곳에서 팜까지도 차로 마중을 나온다. 편도요금 15달러. ETC에는 숙박시설이 있어 미국 남부의 조용한 숲 속 생활을 즐길 수 있다. 가장 좋은 방의 요금이 37달러. 식사는 완전 채식. 채식에 입맛을 붙일 좋은 기회도 될 수 있다. 문의 http://ena.ecovillage.org 또는 http://www.thefarm.org
▼‘생태마을 훈련센터’새 명물로▼
팜에는 생태마을훈련센터(ETC)가 있다. 버섯 재배의 기본, 자연을 활용한 건축, 태양열 전지 설치법, 생태마을 설계, 유기농법, 도시의 생태학과 지속가능한 공동체 등 연중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95년 개설 이후 60개국 5000여명이 이 과정을 거쳤다.
책임자인 앨버트 베이츠는 강화도를 생태마을로 바꾸는 일에도 자문하고 있다. 베이츠씨는 72년 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곳에 와 석조공과 제분공으로 일하다가 몸을 다쳤다. 병원 입원 중에 샌프란시스코 해역의 물고기에서 방사능이 검출됐고 해군이 이 해역에 방사능 폐기물을 버렸다는 뉴스를 듣게됐다. 분노한 그는 놓았던 법전을 다시 들고 이후 14년 동안 방사능과 베트남전 고엽제, 화학폐기물 피해자를 대리해 법정에서 싸워왔다. 끊이지 않은 집단소송의 과중한 부담 속에 그는 다시 건강을 해쳐 이혼까지 하게됐다. 이후 그는 ‘싸우는 환경운동’이 아니라 ‘환경에 이로운 생태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위기의 기후’라는 책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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