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인 미국 변호사 폴 장(한국이름 장혁·34)씨는 캐나다의 법률회사에서 일하다가 1998년 한국에 와 2000년 이 은행에 들어왔다. 그의 업무는 송사(訟事)보다는 기업금융이나 기업 인수합병(M&A) 작업을 법률적으로 돕는 것.
장 변호사를 뽑은 이웅일(李雄一·59) 그룹 대표는 “회사 밖의 변호사들은 우리(금융인)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때가 있다”면서 “그래서 우리의 뜻을 그들(법률가)의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에는 장 변호사처럼 기업 구조조정에 간여하고 외국의 선진 금융기법을 전파하는 변호사 군(群)이 생겼다. 법률가이지만 반쯤은 금융인인 이들의 활약 덕분에 많은 기업이 운영자금을 구해 외환위기가 몰고 온 돈 가뭄을 견뎌냈다.
▽법과 금융이 만났을 때〓기업금융 변호사들은 장 변호사처럼 금융회사에 직접 소속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외부의 법률회사(로펌) 소속이다.
김&장 태평양 세종 광장 등 4대 로펌은 물론이고 충정 율촌 우방 등 웬만한 중형 로펌 대부분이 기업금융 업무를 하고 있다. 한빛 대일 등 금융회사 관련 사건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부티크 로펌’도 있다.
기업금융을 위한 선진 금융기법인 각종 자산유동화증권(ABS)과 채권담보부증권(CBO)의 발행, 프로젝트파이낸싱 등에는 통상 변호사가 넓은 의미의 당사자로 개입한다.
금융은 돈과 권리가 복잡하게 이동하는 고도의 법률행위여서 과거에도 법률가들이 계약서 작성 등에 법률적 지원을 했다. 박상일(朴商一·44) 법무법인 충정 변호사는 “선진 금융기법은 상품 개발단계부터 변호사가 개입해 컨설팅을 해주는 것이 과거와 크게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김용호(金龍鎬·40)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투자은행과 증권사가 고객의 수요에 맞춰 상품을 구상하면 법률가는 이 상품의 앞길에 지뢰밭(법률적 함정)이 없는지를 미리 살피는 ‘예방법학’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충정이 지난해 하나로통신 매출채권 ABS 발행을 자문한 것이나 김&장이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건설자금을 프로젝트파이낸싱과 ABS로 접목시키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금융 전문 변호사 구합니다”〓변호사들은 새 금융기법의 도입 과정부터 큰 역할을 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한국자산관리공사(옛 성업공사)는 98년 4월 자산유동화제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가장 시급한 일이 근거 법률을 만드는 것. 공사는 김&장 법률사무소에 법안 초안 작성을 요청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자산유동화에 관한 법률’이 그해 9월 국회를 통과했다.
12월에는 삼성할부금융의 자동차 할부채권을 유동화하기 위해 최초의 자산유동화전문회사(SPC)인 ‘퍼스트유동화전문유한회사’가 설립됐다. 이렇게 시작된 ABS는 금융회사의 무수익여신(NPL) 처리방법에서 CBO 카드매출채권 ABS 등 점점 복잡하고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다.
2000년 7월과 8월 현대증권과 LG증권이 국내 처음으로 프라이머리 CBO를 발행하는 과정에는 법무법인 대일과 세종이 큰 역할을 했다. 성민섭(成旼燮·44) 법무법인 한빛 대표변호사는 98년 부실종금사 처리와 금융감독위원회의 금융산업구조개혁단 활동에 참여했다.
▽반쯤은 비즈니스맨이 되어야〓성 변호사는 89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 외환은행에서 5년 동안 일한 인연으로 92년 개업과 동시에 금융회사들의 사건을 맡아왔다. 그는 “금융회사의 일과 금융인들의 생각을 잘 아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충정의 박 변호사는 “필요하면 위험도 함께 부담하면서 절반은 비즈니스맨처럼 생각해 고객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의견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법이 이러니 된다 안 된다’ 혹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법으로 안 되면 같은 효과가 있는 다른 합법적인 절차를 찾는 등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객과 함께 노력합니다.”(박 변호사)
하나투자은행그룹 이 대표는 “외환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 참여해 법과 금융의 영역을 함께 확대해 온 주인공들”이라고 평가했다.
▼자산유동화증권(ABS·Asset Backed Securities)▼
보유 자산을 담보로 증권을 발행해 자산을 미리 현금화한 것.
▼채권담보부증권(CBO·Collateralized Bond Obligation)▼
신용등급이 높고 낮은 여러 기업의 채권을 한데 묶어 이를 담보로 새로 발행한 채권. 신용등급이 낮아 회사채를 발행할 수 없는 회사는 물론 신용등급이 높은 회사도 개별적으로 발행할 때보다 금리를 낮출 수 있다.
▼자산유동화전문회사(SPC·Special Purpose Company)▼
ABS나CBO발행등특수목적을위해설립된회사.
▼무수익여신(NPL·Nonperforming Loan)▼
금융기관 대출금 중 일정 기간 이자를 받지 못하는 여신.
▼프로젝트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
금융기관이 석유탐사 등 특정사업의 미래 수익을 보고 신용으로 거액을 내주는 대출.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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